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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18> 내 안의 차별주의

입력 : 2020-07-02 10:28:44
수정 : 2020-07-10 02:31:16

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18> 내 안의 차별주의

 

                                             전종호 작가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저자

김지혜 교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난 독후감 또는 자기 고백이다. 내가 선량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을 읽고 보니 분명히 차별주의자인 건 맞는 것 같다. 선량함과 차별이라는 모순된 가치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차별의 일상성과 그 기제를 알게 되었다. 제목의 <선량한>보통 사람의’, ‘의식하지 못한’, ‘착하다고 믿는등의 말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겠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평균적인 사람이고, 더구나 나름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삶을 살았다고, 아니 적어도 그런 가치를 추구하고 살았다고 믿는 내게 남을 차별할 만한 특권과 특징을 가질 게 무엇인가?

 

 

 

차별은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내가 누리는 편안한 삶이 차별과 희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영구나, 맹구, 시커먼스를 보고 낄낄거리면서도 그런 것이 장애인이나 흑인을 매개로 하는 차별의 웃음 기법이라고 의식하지 못했다. 즐겨 홀로 산행할 때도 혼자서 산에 가기가 무서워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혼자 산을 걷는 여성을 만날 때 혹시 느낄 두려움을 생각하고 길을 기다려주는 것을 오히려 나의 배려요, 친절한 호의라고 생각했지만, 호의가 권력관계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맏아들로 동생들이 자라면서 느꼈을 어떤 차별의 느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일 하는 아내의 가사노동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밤거리를 혼자 걸어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운전을 잘못해도, 외모가 못생겨도 재수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살아온 나는, 밤에 걷기 두려워하거나 운전을 잘못해서 또는 못생겨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특수학급 부모들의 요구와 하소연을 때때로 과잉이라고 생각한 학교행정가로서 나는 그들의 차별 받는 일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교장이 여성이라고 해서 학교가 모든 여교사에게 평등할 것이라고 믿었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내 몫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경쟁교육의 가담자로 교육의 차별기제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 버스를 타는 것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런 특권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발견하지 않으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남성, 계층, 문화, 국적, 이성애자, 비장애인, 언어 등의 특권이 어떤 이에게는 차별을 만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차별주의자였던 것이다.

차별은 경계 짓기에서 온다. 경계는 국적이나 성별 장애 나이, 종교 가족상황, 학력, 지역, 성적지향, 성적정체성 등인데,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임의적이며 따라서 때에 따라 변동된다. 경계는 경계 밖의 사람을 싫어하게 하고 차별은 싫은 감정에서 온다. 감정은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사라 아메드에 따르면 감정은 단순한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사회규범에 투하하는 일종의 자본이다. 부정적 감정과 혐오는 부정의를 가져오고, 혐오가 생산하는 부정의는 때로 폭력의 형태를 띤다.

차별은 불평등과 편향된 능력주의(meritocracy)에서 온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며, ‘같은 것은 같게그리고 다른 것은 다르게대우하는 것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력도 하지 않고 능력도 없으면서 결과를 평등하게 하는 것은 무임승차에 불과하며 정의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공정한 규칙이 되려면 능력과 측정기준이 명확하고 편향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준의 공정성에 대한 합의는 없다.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 갈등 조장용 여론몰이가 아니라 숙의와 통렬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수용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종교의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차별을 하거나 가담한다는 것을 도덕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종 분리를 찬성하던 시절을 지나, 노예제 폐지와 인종간의 결혼을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끊임없이 지지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우리나라 2007년 법무부가 논란을 피해 알맹이 없는 차별금지법을 입법 추진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대하고 있다. 핵심은 성소수자 문제다. 사실 지난 총선은 차별금지법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 진보 진영의 낙선을 위해 개신교의 거의 모든 세력이 전국적인 시국선언을 조직하는 등(이만열, 한겨레, 2019. 9.27) 보수 야당을 업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선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너무나 선량한 목사들이 주일 대중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이름으로 차별금지법 반대와 이슬람 혐오를 설교하고 신자들은 별 비판의식 없이 아멘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반나치즘의 선봉자 본회퍼 목사를 참칭하는 광야의 목사가 거리에서 울리는 차별과 분열의 선동을 의지에 관계없이 듣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광화문 집회에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는 선량한 목사님의 주보 칼럼을 보고 나는 50여년의 교회생활을 청산했다. 지금 이 땅에 예수님이 계시면 무어라고 하실까? 소수자 이방인을 영토 밖으로 밀어내어 투명 인간의 자리에 두지 않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교회에서 배웠던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영토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왔다. 교회의 차별주의에 맞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 방법은 떠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의 플로이드 사건으로 반인종주의, 반차별주의의 목소리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흑인 목숨이 중요하다는 절규에 모든 목숨이 중요하다는 맞불 시위와 구호는 그 기표에 관계없이 염치도, 성찰도, 회개도 없는 행위이다. 차별은 누군가를 숨 쉴 수 없게 만든다(“I can’t breathe”)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야만은 지금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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