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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 교육칼럼 풀씨> (6) 아! 다시 4·16

입력 : 2020-04-15 07:31:44
수정 : 2020-04-15 07:31:57

<전종호 교육칼럼 풀씨> (6)

                     아! 다시 4·16

 

전종호(작가)

 

    석산 진성영 캘리그래피 작가가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아 제작한 추모 작품.

     출처 : 광주in(http://www.gwangjuin.com)

 

! 다시 4·16이 돌아온다. 끔찍한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6년이 되었지만, 유족들은 아직도 새 봄이 와도 눈부신 벚꽃을 차마 마주볼 수 없고 여전히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길거리를 떠돌며 갇힌 세월을 살고 있는데, 한 편에서는 이제 그만하라며 애써 진상을 외면하려고 하거나, “징글징글하게 해쳐먹고 있다며 조롱하면서 편을 규합하여 권력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자들이 있다. 배의 침몰과 함께 국가도 침몰되었다. 구난의 현장에서도, 진실규명의 현장에서도,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법정에서도 국가는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게 나라냐!’는 국민의 탄식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부에서도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나 수사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하고 수업에 들어갔다가 나와 허연 뱃가죽을 드러내고 죽은 물고기처럼 밑바닥을 드러낸 채 뒤집힌 배를 보고 경악했던 2014416일의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시킨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도 여전히 전율로 남아 있다. 참사 이상의 참사에서 우리는 묻고 또 물었다. 세월호는 왜 짙은 안개 속에서 출항했는가, 배는 어떻게 쓰러지고 뒤집혔는가, 구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왜 국가의 재난구조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는가, 당시의 보고와 명령체계 상의 허점은 무엇이었는가? 그때 묻고 또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6년이 지난 지금도 듣지 못하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의 과정에서 그날 대통령은 출근하지 않았고, 비서관은 자전거를 타고관저의 문고리에게 보고서를 전달했으며,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했고, 현장 책임자들은 구조보다 상부에 보고할 영상자료를 확보하느라 바빴으며,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 그날도 사설 미용사를 불러 머리를 만진 다음에 국가재난본부에 늦게야 도착한 대통령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어렵습니까?’ 라는 헛소리를 남겼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국가란 무엇이고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다시 묻는다. 해방 이후 우리는 거의 50년 가까이 권위주의적 국가체제 속에서 살았다. 권위주의적 국가체제에서 국민은 반공전사요 산업 역군이었고, 전쟁과 산업전쟁에서 항상 동원의 대상이었으며, 냉전의 상태에서 만일의 사태를 위해 대비해야 하는 예비군이었다. 문민정부 이후 국가는 시장의 얼굴로 분장하고 나타났다. 국가는 세계화에 편입되어야 했고 국민은 소비자는 왕이라는 광고의 카피로 대우받았으나, 세계시장에서 선진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말단 소비자로 결국 세계화의 덫에 걸려 파산의 쓴 맛을 보아야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우리는 인적자원이 되어야 했고 교육부는 인적자원부가 되었으며, 참여와 분권을 기치를 내걸은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선언할 만큼 국가는 시장에 포획되었다. CEO 대통령을 표방한, 뒤이어 들어선 정부에서는 대통령은 아예 건설국가 회사의 CEO로 민간건설 회사까지 지휘하여 전국의 강들을 모조리 파헤치고 뒤집었다.

그리고 이상한 정부가 들어섰다. 세계는 모두 이미 참여적이고 신축적이며 탈규제적인 모형으로 정부를 개혁해 가고 있는 추세에서, 권위주의 국가에서 친시장적인 정부로 전환한지 20년 만에 다시 권위주의 국가로 돌아간 것이다. 유신의 망령과 정보기관이 부활하고, 국사 국정교과서가 도입되고 국가는 이념화되어 갔다.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무능하고 부패한 측근정치 하에 4·16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입장에서 가장 상위의 체제이다. 사상과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국가체제 안에서 작동한다.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주의적 인간의 양성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기능을 습득한 인간의 양성이 교육의 목적이다. 국가주의 교육체제에서는 국가의 지도와 명령에 순응하는 사람을 기르려고 한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우리가 끝없이 전율하는 것은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국가체제와 그렇게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제도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우리는 얼마나 국가주의적 명령체계에서 벗어나 있는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체적으로, 자기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만큼 강한 자아를 갖추도록 교육체제를 바꾸었는가? 출항해서는 안 되는 짙은 안개 속에 배를 띄우는, 더 많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 배를 불법 개조하고 평형수를 빼버리는 탐욕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개나리는 노랗게 피고 산천은 진달래로 물들어 가는데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족들, 절망과 공포와 불안에 삶을 포기하고 떠나는 유족들이 있는 세상에서 나 홀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든 지 몇 시간 만에

달뜬 수학여행을 태운 배가 침몰하고

 

바다에 자식을 묻은 수 백 명의 어미 아비가

함께 울던 이웃들과 소리쳐 울부짖을 때

 

 안산 중앙역에서 학교를 거쳐 화랑 분향소까지

애도의 인파가 슬픈 물결이 되어 흐를 때

 

진실을 알려달라는 국민의 목소리를 향해

빨갱이들 시체장사라고 비하하고 놀리며

 

힘으로 법으로 눌러 진실을 감추며

이제 슬픔을 거둘 때라고 점잖게 훈계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졸시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 일부).

 

그리고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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