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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 교육칼럼 풀씨> (5) 선거하기에 좋은 나이는 따로 없다

입력 : 2020-04-09 01:44:29
수정 : 2020-04-09 01:46:34

<전종호 교육칼럼 풀씨> (5)

선거하기에 좋은 나이는 따로 없다

 

 18세 선거권 확대를 환영하는 청소년YMCA의 퍼포먼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전종호(작가)

 

바야흐로 선거의 시절이다. 코로나19로 어느 때보다 조용한 선거지만, 선거는 선거인지라 물밑의 열기는 역시 뜨겁다. 지난 연말 공직선거법 개정안 통과에 의해서 치러지는 21대 총선거의 특징은 18세 청년의 투표권과 준연동형 비례제의 실시라고 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의 국회 토론 부재, 의결 과정의 폭력성, 사표 방지와 민의의 비례성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을 붙임으로써 원래의 취지를 심각하게 변질시킨 누더기 선거법, 이마저의 결과도 비웃기라도 하는듯한 거대정당의 변칙적인 위성정당 급조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납득할 수 없는 위성정당 등록 허용 등에 대해서 여기서 새삼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만18세 청년이 공직선거에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 올해 만18(2002416일 이전 출생자)가 되는 청년들 약 55만 여명이 이번 선거에 참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청소년 투표권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와 정치권의 논의가 있었지만, 청소년의 미성숙성과 학교의 정치화를 핑계로 청소년의 참정권이 거부되어 왔다.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 우리보다 발전이 더딘 베트남,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라오스 등 35개국에서도 18세 선거권을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쿠바, 니카라과, 에콰도르에서는 16세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고 이들 나라에서 학교의 정치화가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뉴스를 들어 본 사실이 없다는 점을 비춰 볼 때, 일부 정치권의 주장은 단순한 염려라기보다는 청소년의 참정권을 민주주의나 국가발전의 차원이 아니라, 정당이나 정파의 이해관계와 유불리의 차원에서 접근해 왔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참정권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의식이 희박한 점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성 정치인이나 성인들이 정치 주체로서의 청소년을 배제하고 이런 관념을 내재화한 결과이며, 입시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교육현실 탓이기도 할 것이다. 18세 청년의 투표권 부여에 대하여 35명 중 5명만이 찬성하고 대부분은 반대하거나 무관심하였고, 반대하는 학생들 다수는 투표가 공부를 방해하거나 인기투표로 변질될 것 같다는 이유를 들었다는 EBS의 보도는, 샘플이 지나치게 작고 질문의 방식도 거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 청소년들의 정치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즉 청소년들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는 어른들의 영역이라는 성인들의 정치의식에 물들어 정치적 주체로서의 권리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선거에 앞서 참정권 교육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참정권 교육은 단순히 투표 교육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어렵게 얻은 투표권이 기권이 되거나, 투표과정의 잘못된 이해로 무효가 되어서도 안 된다. 투표의 과정과 기표의 방법에서, 첫 투표라고 해서 들뜨거나 일상화된 인증샷의 습관으로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하는 등 투표 무효 행위로 이어져서도 안 된다.

참정권 교육은 참정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참정권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신분제도, 인종 문제와 남녀 간의 성평등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과정 속에서 오늘날 선거권이 주어졌다. 투표장에 가기 전에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같은 여성참정권론자의 영화 <서프러제트>라도 보면 좋겠다. 투표가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오랫동안 인내해 왔는지를 마음으로 공감하면 좋겠다. 참정권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권리의 문제이지만, 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배제와 차별의 문제이기 때문에 만18세 청년의 참정권은 당사자의 차별과 배제를 해제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만18세 청년의 투표권 행사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선거의 중요성, 권리의 실현 방법, 정강 정책의 비교, 정책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 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도 개인적인 것보다는 집단적인 방법으로, 단순한 지식 습득의 차원이 아니라 토론과 실습 위주의 방식이면 더 좋다. 이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 모의투표 방식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의투표는 선관위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다. 현재 코로나19로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상태에서 참정권 교육도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아가 참정권 교육은 선거를 앞둔 일회성 차원의 선거교육이 아니라 시민교육, 또는 정치교육의 차원으로 종합되어야 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시민교육을 통해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리와 의무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미래 세대의 정치 주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교육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의 교화(敎化)에 설득되지 않고 미디어의 이미지 정치나 여론을 빙자한 선동정치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18세 청년의 투표 참여로 인한 학교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와 염려가 있다. 이미 만18세 또는 만16세 투표권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들, 특히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교사의 노동조합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되고 있는 나라에서도 학생에 대한 교사의 선거 개입 사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특정 교원단체가 교직사회를 과잉대표하고 있지도 않고, 교사들의 의식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나이브하지도 않으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하여도 자체적으로 걸러낼 수 있는 자정체계가 어느 조직보다 건강하다.

이번 선거에 우리 18세 청년들이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게 모르게 유포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 청년세대 또는 계급으로서 당면한 현실의 문제, 즉 교육문제나 입시문제 등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치인들의 말은 달고 그들의 문장은 유려하다. 그들의 말과 글을 보지 말고 그들이 누구와 잡은 손과 하는 행동을 살피라. 그들이 날마다 입에 달고 사는 국민이 인지 나의 이익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인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선택하고 차선도 없으면 차악을 선택하라. 투표에 참여하는 올해의 만18세 청년들에게, 그리고 계속해서 만18세가 될 미래의 청년들에게 진부하지만 불변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루돌프 폰 예링의 법언을 선물한다. 씹고 또 씹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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