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⑮ 시와 음악과 이야기에 능했던 성현

입력 : 2017-02-10 11:04:00
수정 : 0000-00-00 00:00:00

 

시와 음악과 이야기에 능했던 성현 

 

●문화재명: 용재 성현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0호) 


▲ 용재 성현 묘역(파주시청, 문산읍 내포리 산 60-1): 성현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는 참화를 당했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다시 임진강변을 따라 답사를 시작해 보자. 자유로의 낙하 IC에서 반구정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문산 읍내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샛길로 접어들어 내포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들어가면 내포4리 복지 회관을 볼 수 있다. 복지 회관을 지나서 오른쪽 산등성이에 성현의 묘가 있다. 성현은 호가 용재 또는 허백당으로 꽤 이름난 인물이다. 하지만 파주 사람조차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학창시절에 「악학궤범」이나 「용재총화」라는 책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저술한 이가 바로 성현이다.

 

시를 지어 중국 선비를 매료시키다

성현은 창녕성씨로 조선 초기의 문벌가 출신이다. 성석린, 성승, 성삼문 등이 모두 조선 초기에 이름을 날린 창녕성씨이다. 그의 큰형인 성임은 김수온, 강희맹, 서거정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관료를 친구로 두었다. 자연스럽게 형의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학문을 익혔다. 시도 잘 짓고 음악도 잘 알고 이야기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 23세 때인 세조 2년(146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고 사신이 되어 형님과 함께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본 것들을 시로 읊어서 「관광록(觀光錄)」을 만들었다.

“성현이 누구더냐 해? 이렇게 멋진 시를 짓다니.”

“어디 보자 해. 우리 사람은 시 좋아한다 해.”

성현의 시를 보기 위해 중국 선비들이 탄복하여 모여들었다. 성현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때에도 중국 사신과 시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음악을 알아서 「악학궤범」을 짓다

시를 잘 짓는 것은 물론 거문고도 잘 탔다. 특히,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의 행장을 지은 김안국은 성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밤에는 달을 마주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며 아득히 생각에 잠겨 있곤 하였는데 바라보면 마치 신선 세계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성종은 중국의 음악은 물론 조선의 음악과 궁중 음악을 정리하라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한편, 성현을 경상도관찰사로 지방관에 임명하였다. 이때 한 신하가 나서서 만류하였다.

“경상도관찰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음악 정리는 성현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현이 예조판서와 장악원제조를 겸하면서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악학궤범」에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정읍사’를 비롯하여 고려 속요 ‘동동’등이 실려 있다.


▲ 악학궤범: 성종 24년(1493)에 성현(成俔) 등이 왕명에 따라 펴낸 음악책. 음악의 원리ᆞ악기 배열ᆞ무용 절차ᆞ악기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으며, 궁중 의식에서 연주하던 음악이 그림으로 풀이되어 있다.

 

이야기 모아 「용재총화」 남기다

성현은 유학자이지만 유학과 관련이 없는 다양한 책을 읽었고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도 수집하였다. 그의 행장에는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방 안에 정자세로 앉아 좌우에 책을 진열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혹심한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민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 남긴 것이 바로 「용재총화」이다. 「용재총화」에는 유학자, 서예가, 음악가, 화가 등 다양한 부류의 역사 인물의 일화가 담겨 있고, 기생이나 탕녀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그밖에도 고장의 이름난 명승지는 물론 승경도놀이와 같은 민속과 풍속이 실려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의 묘소에 풀이 나지 않는다는 일화나 어우동 이야기 등이 실려 있기도 하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부관참시되다

성현은 상례와 장례를 간소하게 차릴 것, 풍수지리는 따지지 말고 묘소를 쓸 것, 비석은 세우지 말 것 등의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잡힌 묘소가 파주 서면 두견봉 아래이다. 그런데 묏자리가 좋지 않았는지 죽은 뒤 얼마 안 있어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형벌)를 당하였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죽은 상태에서 한 번 더 죽는 참화를 당한 것이다.

성현은 벼슬을 살면서 권력을 지향하지 않아서 고관대작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 의복, 음식, 거마 등에도 사치하지 않았다. 대신 풍류를 좋아하였다. 풍류를 좋아한 까닭에 우리의 전통 음악과 민속이 정리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것이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8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