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⑯ 시와 음악과 이야기에 능했던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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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등이 독특한 성임 묘역
●문화재명: 성임 묘 및 신도비(파주시 향토 유적 17호)
성현의 묘에 왔으니 그의 형인 성임의 묘도 방문해 보자. 그리 멀지 않다. 성현의 묘에서 내려와서 내포리 복지회관 반대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성임의 묘가 있다. 성임은 동생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대에는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고 동생과 함께 탄탄하게 관료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그의 비명에 나와 있는 기록을 토대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살펴보자.
천재적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다
성임은 뛰어난 골격을 가졌으면서도 좋은 두뇌를 가지고 태어났다. 서당에서 공부할 때면 이해가 빠르고 막힘이 없었다. 7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서당 친구가 효경을 읽고 있었는데, 성임은 가만히 옆에서 듣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물러 나와서 효경을 그대로 읊었다.
“이야, 너 내 아들 맞아? 장차 큰일을 하겠구나.”
성임의 아버지(성염조)는 아들이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고 남들보다 뛰어난 일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성임은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능지기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대과에 합격하여 큰길을 가겠다면서 사양하였고, 결국 세종 2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다방면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다
성임의 벼슬살이는 순탄했다. 세종 때부터 세조, 예종, 성종을 거치며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특히,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2등 공신이 되었고, 『국조보감』과 『경국대전』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성임도 동생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도 좋아했다. 동생인 성현이 『용재총화』 를 남겼듯이, 성임은 중국과 조선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태평통재(太平通載)』를 남겼다. 성임은 시에도 능했다. 동생인 성현과 함께 외교 사절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관료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성임의 시도 멋지구나. 자네는 성현하고 어떤 관계냐 해?”
“내가 성현의 형이올시다.”
중국 선비들이 성임과 성현의 글을 얻고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두 형제의 명성이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까지 퍼진 것이다.
붓글씨로 세조를 감탄시키다
하루는 세조가 가지고 있던 조맹부의 글씨(송설체)를 내놓고 성임에게 써 보라고 명하였다. 성임은 단정하게 앉아서 조맹부의 글씨를 그대로 베꼈다.
“어느 게 진본인가? 이건가? 아니면 이건가? 내 눈으로 봤지만 믿기질 않는구나.”
세조는 성임의 송설체가 조맹부가 쓴 것처럼 너무나 똑같아서 칭찬하였다. 그리고 당시 궁궐의 문액(문 의 이름을 지은 액자)이나 사찰의 비문 등을 성임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한편, 명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궁궐을 모두 둘러보고는 하는 말이 창경궁 홍화문과 문묘 대성전의 편액을 높이 평가하였다.
“홍화문과 대성전의 글씨가 아주 좋으니 나에게 모사를 해 주시오.”
바로 성임의 글씨였다. 하지만 성임의 글씨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성임 묘역의 장명등이 특이하다
성임은 중풍에 걸려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64세를 일기로 성종 15년(1484)에 생을 마감했다. 그해 파주 서면 오리곶의 언덕(지금의 묘역)이 명당이라 하여 묘를 쓰게 되었다. 성임 묘역에는 무인석 2기와 석등 1기가 있다. 그런데 석등에 눈길이 간다. 지난 박중손 묘역 답사(파주에서 49호) 때 장명등의 화창이 해와 달, 그리고 땅을 상징한다고 하여 보물로 지정됐음을 소개했다. 성임 묘역의 장명등 역시 두 면의 화창이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또한 특이한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단정할 수 없지만, 문중이나 연구소 차원에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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