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⑱ 황희, ‘황금 대사헌’? 청백리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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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황금 대사헌’? 청백리 맞나?
●문화재명: 반구정(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화완옹주 묘역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면 정면에 얕은 언덕이 있는데 반구정이 있는 곳이다. 묘역에서 나와 우회전하여 가다가 굴다리 밑으로 좌회전을 하면 된다. 반구정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풍류를 즐기던 정자이다. 지난 53호 연재에서 황희의 찬란함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그의 부끄러운 과거도 들추어 보자.
황금 대사헌으로 평가받다
황희 하면 ‘정승’ 외에 떠오르는 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청백리’다. 보통 황희를 청백리라고 수식을 많이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을 들여다보면 꼭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그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황희는 황군서의 얼자(노비 처의 자식)로 대사헌이 되었을 때 승려로부터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 하였다. …황희가 장인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가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범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파주의 3현 중 하나로 평가받는 황희에 대한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다. 세종 대왕이 황희의 집에 몰래 방문했는데, 멍석을 깔고 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먹었다는 일화와도 정반대의 기록이다.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다
황희에게는 노비 첩에서 얻은 황중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중생이 왕실의 물건을 여러 차례 훔치다가 발각되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금을 20냥 훔쳤으면서 네 집에서 나온 것은 어찌하여 11냥뿐이냐?”
“9냥은 저의 형님인 황보신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 놈이 거짓말을 합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황희는 중생을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고, 중생은 자신의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 또, 황보신(차남)은 유배를 가는 대신 국가에서 받은 토지를 반납하게 되었는데, 이때 황치신(장남)이 자신의 척박한 땅을 국가에 반납하고 황보신이 소유하던 땅을 차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황치신도 파면되었다. 황희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원수 같았을 것이다. 세종은 무거운 형벌 대신 황희의 뜻을 존중하여 가볍게 처리하였다.
영욕을 뒤로 하고 갈매기와 벗하다
이밖에도 『세종실록』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황희의 모습과는 다른 내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세종은 그럴 때마다 황희의 능력을 아끼며 감쌌다. 어쨌든 황희는 벼슬살이의 영욕을 뒤로 하고 87세에 은퇴하여 지금의 사목리로 낙향하였다. 황희는 임진강 남안에 정자를 지어 반구정(伴鷗亭)이라 했다. 반구정은 말 그대로 갈매기를 벗으로 삼아 즐기는 정자이다. 아무래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세상 시름을 잊고자 갈매기를 벗으로 삼은 것 같다. 조선 후기 숙종 때 허목이 남긴 『반구정기』를 살펴보자.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희의 정자이다.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는데 …후손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이라 하였다. …물러나 강호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들고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청백리는 아니어도 어진 재상이다
우리가 보통 황희를 청백리라고 일컫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종실록』이나 『문종실록』에서 그가 청백리로 녹선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문종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에는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라고 나온다. 그런데도 청백리로 불리는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관료와 선비들이 황희를 청백리로 포장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고 황금기인 세종 때에 약 20년간 재상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국 운영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세종도 이를 인정했기에 황희의 허물은 가벼운 것이라 평했다. 황희가 세종을 보필하면서 비리를 일삼고 국정을 농단했다면 조선 초기의 문화 창달이 가능했겠는가? 황희의 졸기에는 청렴하지는 못했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비록 늙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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