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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와 쌍벽을 이룬 성리학자 성혼

입력 : 2014-11-12 2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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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와 쌍벽을 이룬 성리학자 성혼

문산 시내에서 파주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수억 중학교 조금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이 있다. 원룸 빌딩을 끼고 구불구불 차를 몰고 가면 향앙3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그 옆으로 우계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뒤쪽으로는 우계의 묘가 있다. 우계가 과연 누구일까?

영조 임금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다

1740년 가을의 어느 날, 영조가 개경(개성)에 있는 정종의 능(후릉)을 참배하러 가고 있었다. 영조는 파주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임진나루로 가던 중 우계의 묘소를 본다. 그리고 묘소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예의를 표한다.

“지금 내가 닮고자(고심)하는 것은 곧 선현의 마음이다. 길가 교자 안에서 허리 굽히니 감개한 마음이 한없이 깊다.”

영조 임금이 마음을 닮고자 허리를 굽혔던 선현이 바로 우계 성혼이다. 성혼은 이이와 함께 파주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다. 성혼은 38세가 되던 해인 1572년 여름, 율곡(지금의 화석정 일대)에 머물던 이이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며 성리학에 대해 물었다. 이렇게 시작된 성리학 논쟁이 바로 우율논변(율우논변=율곡과 우계의 논쟁)이다.

우율논변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논쟁이다. 학자들은 우울논변을 통해 이이가 자신의 사상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평가한다. 즉, 이이의 사상 정립에 성혼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율논변과 우정으로 존경하다.

성혼과 이이는 학문적 견해가 달랐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친밀했다. 성혼은 스무 살 때 이이와 교우관계를 맺은 이래로 이이의 학문을 존경하며 따랐다.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하여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계는 알고 나서는 곧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는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성혼과 이이는 학문적 견해가 달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스승으로 여겼던 것이다.

선조 임금이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라다

한편, 당대의 임금인 선조도 성혼을 매우 아꼈다. 선조는 성혼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벼슬을 제수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소를 올려 거절한다. 조정에서 이이와 성혼이 붕당을 만들었다며 비판하자, 선조는 두 사람을 옹호하고 나섰다.

“참으로 군자(君子)라면 당(붕당)이 있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이 적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나는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공자와 함께 동국 18현으로

사실 성혼은 학문적으로는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벼슬을 꺼려 재야에 머물렀다. 우계(지금의 파평면 눌노천)에 거주하면서 서실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강요에 못 이겨 벼슬살이를 했으나 언제나 물러가기를 청했다. 후학들은 성현이 죽은 뒤 그의 학식을 본받고자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성혼은 공자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동국 18현이 되었다. 파주읍에 있는 우계 기념관이나 파평면에 있는 파산서원에 들러 성혼의 수기(修己) 정신을 돌아 볼 일이다..

 

정헌호(향토사학자) 해와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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