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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역사 교실 ⑧ 정난정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

입력 : 2015-01-23 12:09:00
수정 : 0000-00-00 00:00:00

기생에서 정경부인으로

 

교하 이마트 근처에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는 90여 기의 묘가 흩어져 있다. 이중에는 명종 때의 최고 권신인 윤원형과 그의 첩인 정난정의 묘도 있다. 정난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노비로 사느니 기생이 되다

정난정은 아버지가 고위 무반직을 지낸 사대부였으나 어머니가 관비 출신의 첩이었다. 알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신분 상승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여성이면서 노비라면 더욱 그러했다. 정난정은 신분에 갇혀 한탄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스로로 개척했다. 

“노비로 사느니 차라리 기생이 되어 사대부와 어울리는 게 낫겠어.”

 

기생에서 사대부의 첩실이 되다

기생이 된 정난정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정계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던 윤원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윤원형은 중종의 셋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다. 이때 윤원형은 당시의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내인 연안김씨가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다 사약을 받아 죽은 김안로의 조카딸이기 때문이다. 정난정은 윤원형과 가까이 지내더니 결국 그의 첩실로 들어갔다.

 

첩실에서 정실부인이 되다

정난정은 사대부의 첩실로 만족하지 않고 결국 윤원형의 아내인 연안김씨를 내쫓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쫓겨난 연안김씨는 정난정에게 굶주림을 호소하였다. 정난정은 김씨에게 줄 음식에 독약을 넣은 뒤 구슬이라는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구슬아, 이 음식을 옛날 너의 상전에게 가져다주어라.”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난정이 연안김씨를 독살한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종1품 정경부인이 되다

정난정은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하였다. 12살 나이로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남편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대비(임금의 어머니)로서 정치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때 윤원형은 문정대비의 반대 세력을 몰아내는 을사사화(1545)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정난정은 지략을 제공하며 윤원형을 움직였다. 을사사화가 마무리된 뒤 윤원형은 문정대비에게 부탁을 한다. 

“난정이를 정경부인에 봉하는 직첩을 내려주소서.” 이렇게 해서 정난정은 남편의 품계에 따라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권세를 누렸다. 재리에도 밝아서 권세를 이용해 재물을 모았다. 양반들은 앞다퉈 정난정과 사돈을 맺고자 했다. 

 

죽음 또한 스스로 선택하다

늘 그러하듯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을 보살펴주던 문정대비가 사망하자 남편인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정난정은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 땅에서 숨어 살았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부인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체포될 위기에 처해졌다. 

“남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는 게 낫다.” 

정난정이 가지고 있던 약을 마시고 자살하자, 며칠 뒤 윤원형도 따라 죽었다.  

조선 시대에는 정난정을 요부나 악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의 시각일 뿐이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지탄을 받을 수 있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해 가며 여봐란듯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하는 모습은, 여느 남성 못지않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윤원형이 정난정을 따라서 죽은 것을 보면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헌호 (역사교육전문가)    

 

윤원형과 정난정(뒤)의 묘(당하동 성재길 220): 윤원형의 묘는 본부인 연안김씨와 함께 조성되어 있고, 정난정의 묘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정난정의 묘비에는 그녀를 ‘정경부인’이 아닌 ‘첩실’로 표기하였다. 윤원형은 연안김씨보다 정난정과 함께 묻히기를 소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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