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④ 개성과 철원, 코리아의 시작(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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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왕건의 이상이 추락한 자리
▲썩은소-왕건의 위패를 실은 돌배가 쇠를 끊고 사라진 곳이다.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북한역사는 우리역사일까? 고구려를 배우는 것처럼 북한을 배운다면 큰일 날 일일까? 우리 영토 밖에 있는 고구려는 왜 우리역사일까? 신라의 통일은 백제와 고구려를 지워버린 것일까? 삼국사기처럼 우리는 이국사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해답의 실마리가 개성과 철원 사이에 있다. 남북분단 현장, 남북을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변방의 도시 개성과 철원. 두 도시는 천 년 전 우리역사의 한 때를 밝혔고 오늘은 미래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개성에는 경의선이 연결되고 남북합작의 공단이 운영 중이다. 고려궁성 발굴사업도 남북이 함께 벌이고 있다. 휴전선에 걸쳐 있다는 철원 궁예도성은 그 절묘한 위치 때문에 남북공동 사업으로 주목받지만 폐허지경에 버려져 있다. 경원선도 끊어진 채 그대로다. 두 도시는 함께 열려야 할 길목이지만 어디가 먼저냐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DMZ평화공원 입지를 두고도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다투는 모양새다. 이런 경쟁이란 따지고 보면 중심의 선택을 바라는 소외된 자의 초라한 갈망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울이고 평양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서울과 평양의 선택일 뿐 개성과 철원의 결심은 아니다. 한때 두 도시가 중심을 놓고 겨루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가 서울이고 평양이던 시절, 개성과 철원을 오가는 길은 우리 역사의 중심이었다. 개성에는 왕건이 있었고 철원에는 궁예가 있었다. 여기서 코리아가 나왔다.
궁예는 처음 철원에 터를 잡았다. 개성의 왕륜, 왕건 부자가 귀순하면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후고구려를 표방한다. 궁예를 따라 왕건 역시 개성과 철원을 오간다. 그 자취가 지금 고려종묘 숭의전으로 남았다. 숭의전은 조선건국 후 고려왕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왕건을 위해 기도하던 임진강 앙암사가 숭의전이 들어서는 기초가 됐다. 앙암사는 개성과 철원 중간에 위치해서 두 곳을 오가던 왕건이 묵어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개성을 나와 장단, 적성, 마전을 지나 철원에 이르는 길목이다. 궁예와 왕건, 이때 이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쇠락한 신라가 그런대로 버티는 가운데 발해가 멸망했다면? 고구려는 우리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이들이 고구려를 표방하지 않고 단지 신라 계승을 선언했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 신라가 고구려 역사를 우리 역사로 기록했을 리 만무다. 단군과 고구려가 정연한 우리역사로 정리된 것은 고려에 와서다. 철원과 개성 사이 역사는 단지 반도의 중앙 어떤 지점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우리 역사를 대륙으로 확장하는 웅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코리아의 시작이다.
▲숭의전-고려왕을 제사지내는 종묘다. 임진강변에 있다.
왕건은 오백년 뒤 죽어서도 이 길을 간다. 이때는 육로가 아닌 수로, 임진강을 따라갔다. 고려가 망하자 왕건의 위패를 실은 돌배가 도망치듯 예성강을 빠져나온다. 바다로 나온 돌배는 밀물에 밀려 임진강으로 들어오고 삭녕에 이르렀다가 다시 떠내려 온다. 사람들은 바위 절벽에 배를 묶어두고 위패를 모실 곳을 찾았다. 돌아와 보니 배를 묶었던 쇠밧줄은 썩어 없어지고 배는 앙암사 절벽에 붙어 있었다. 여기에 왕건의 사당을 지었고, 돌배가 사라진 곳을 썩은소라 불렀다. 살아서 다니던 길을 죽어서 갔고 그렇게 숭의전이 생겼다. 고려의 시작과 끝이 철원과 개성 사이 길목에 놓여있는 것이다.
궁예는 하찮은 신분에서 왕까지 오른 인물이다. 역사는 궁예를 포악한 왕으로 기록한다. 그는 왕이었지만 실질적 영토는 호족에도 미치지 못하는 떠받들어진 왕이었다. 홀로 우뚝할 뿐이었다. 언제 빠져나갈지 모를 지방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호족들과 관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륵을 자처했다. 미흡한 영토를 사상적 영토로 만회하려 했다. 그는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갔다. 미래의 미륵을 현재에 불러오려는 궁예의 꿈은 화려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미래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현실은 현재에 발붙인 자들의 차지였다.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는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
▲어수정- 왕건이 개성과 철원을 오가던 길에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역사는 보수적이어서 무작정 건너뛰는 법이 없다. 성큼 건너뛰었다가도 너무 왔다 싶으면 물러나 앉고 만다. 이상은 실현되지 않고 추락한다. 현실은 꿈꾸는 자의 몫이 아니라 꿈에서 깬 자의 몫이다. 위안이 있다면 역사란 바로 이상이 추락한 자리에서 가지를 뻗는다는 사실이다. 궁예가 무너진 자리에서 왕건이 피어났다. 알 수 없는 것은 무너진 자리 한편에서 꿈의 가지도 다시 피어난다는 것이다. 전설은 궁예를 당당한 고려왕으로 되살려낸다. 자신의 운명을 안 궁예가 삼방협에 이르러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 우뚝 선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궁예는 죽었지만 우뚝 서 있다. 코리아를 위해 지금 추락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뚝 서야 할 것은 무엇일까? 휴전선을 베고 누운 개성과 철원이 하는 질문 같은 이야기다.
이재석(DMZ 생태평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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