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④ 개성과 철원, 코리아의 시작(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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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태어난 궁예, 임꺽정을 기다리며
▲ 임꺽정이 꺽지가 된 한탄강과 고석정.
궁예와 함께 철원 땅에는 죽어도 죽지 않은 죽음이 하나 더 있다.
“물샐 틈 없는 추격에 할 수 없이 한 촌가에 들어갔다. 노파를 위협해 도둑이 달아나는 모양을 꾸미고는 혼잡한 틈에 달아나려 했으나 마침내 발각됐다. 활을 마구 쏘아 맞혀 매우 상하였다.”
정사에는 기록조차 없는 야사의 한쪽이다. 주인공은 꾀를 써서 달아나려다 무참하게 죽어갔다. 이 사람에 대해서도 전설은 다르게 진술한다. “철원 고석정은 그가 활약하던 무대였다. 관군이 추격해 오자 한탄강으로 들어가 꺽지가 되어 사라졌다.” 죽어서도 우뚝 선 궁예처럼 처참하게 죽어 간 야사의 인물도 강물 속에 꿈틀거리며 살아있다. 이들의 죽음은 증명할 길이 없다. 모두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협곡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망 선고를 할 수 없는 실종상태. 이로써 이들은 혹시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의심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꺽지가 된 인물은 임꺽정이다. 궁예와 임꺽정은 이렇게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철원에 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최후와 사후만이 아니라 시작도 비슷했다. 궁예는 세달사로 출가하기 전까지 도무지 말릴 길 없는 말썽꾸러기였다. 견디다 못한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실토한 뒤에야 충격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궁예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안성 칠장사라는 속설이 있다. 임꺽정은 이름이 그렇듯 어려서부터 걱정거리였다. 걱정스런 인생을 살던 임꺽정은 스승 갓바치가 주지로 있던 칠장사에서 의형제 결의를 맺고 화적두목의 길을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칠장사 명부전 벽화에는 궁예와 임꺽정이 함께 그려져 있다. 칠장사 이후 둘은 변방으로, 변방으로 달려간다. 궁예는 강릉과 철원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 임꺽정 역시 개성과 강원도 이천, 평산 등 서울 북방 곳곳에 출몰한다. 집안의 말썽꾸러기들은 이제 시대의 걱정거리가 됐다. 차이가 있다면 이 과정에서 궁예는 왕이 됐지만 임꺽정은 화적 두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물이 그만큼밖에 못됐기 때문일까? 임꺽정을 위한 변명은 그를 세상에 불러낸 작가 홍명희가 이미 마련해 두었다. “그때 그 시절에 천민이 잘나면 화적질밖에 할 것이 없었다.”
▲ 철원 고석정의 임꺽정
궁예 역시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화적질 밖에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궁예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세울 변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지방호족은 든든한 배경이 됐다. 임꺽정에겐 청석골 도적패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임꺽정이 싹 틔울 변방은 그만큼밖에는 안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궁예는 임꺽정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궁예의 변방도 결실을 맺을 정도는 못돼서 유력한 지방호족인 왕건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싹은 틔웠으나 꽃 피지 못한 것이 임꺽정이라면 꽃은 피웠으나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이 궁예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경과의 차이일 뿐 메마른 역사에 씨를 뿌린 몸짓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뿌린 씨앗은 결국 누군가는 거둘 터였다. 궁예가 뿌린 씨는 왕건이 차지했고 거기서 코리아가 시작됐다. 임꺽정의 씨앗은 누가 거두었을까? 조선중기 조광조 등 유학자의 실패 이후에 벌어진 혼란은 도학에 바탕을 둔 사림정치의 등장으로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오늘 변방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개성과 철원 사이 비무장지대를 말한다면 이 칼날 같은 경계는 변방의 영토를 허용하지 않는다. 변방의 크기로만 말한다면 현실은 임꺽정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화적질도 해 먹을 수 없는 시절이다. 궁예도 임꺽정도 현실이 되지 못한 채 전설에 갇혀 있다. 칼날 같은 변방에 통로가 생기지 않는 한 왕건도, 사림들의 정치도 나올 여지가 없다. 궁예와 임꺽정이 먼저 풀려나와야 한다. 감악산에, 불곡산에, 고석정에, 곳곳에 숨어있는 임꺽정들이 출몰하기 전까지 우리는 걱정스러운 역사를 살아야 할지 모른다.
이재석(DMZ 생태평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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