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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22)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

입력 : 2015-08-26 09:54:00
수정 : 2020-07-31 10:25:45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22) 

탐루 등불 들고 ‘전쟁반대" 외친 한국의 디오게네스

"눈물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김낙중 선생은 1931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남과 북의 정권에서 모두 버림받고, 5번의 사형선고를 받고, 18년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런데도 선생의 삶과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대의 아픔이 커진 만큼 어둠 속 등불처럼 우리에게 빛을 주고 있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집 근처 도서관에 매일 나와서 책을 보시는 일상을 누리고 계셨다.

가느란 몸매에도, 눈빛은 형형하고, 논리는 반듯했다. 당신의 삶을 말씀하시는 낮은 목소리에 간간히 힘이 실리면, 젊었을 때 몰두하고 집중했던 열의가 살아 올랐다. 역사의 무게란 선생의 목소리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폐병에 걸려 삶의 의미 탐구하다 전쟁 맞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진학했다. 당시 일제가 중학생을 근로동원 했기 때문에 동원에서 제외되는 경성농업중학교(서울농업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16세 무렵 폐병에 걸렸다. 반에서 1등을 했는데,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 사는 게 무엇인지? 참된 삶의 의미를 탐구하느라, 새문안교회, 조계사에서 교리를 듣고, YMCA에서 열리는 함석헌선생의 노장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철학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다. 서울에 있었는데, 1주일만에 인공기 천하가 되었다. 무악재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파주까지 100리길을 걸었다. 고향가는 100리길 왼쪽에도 시체, 오른쪽에도 시체였다. 사는 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사람이 왜 서로 죽여야하는 건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돌아온 고향 파주에서 인민군이 의용군을 모았다.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두 나갔지만, 도망가서 통일동산 뒤 봉화산 굴에 숨어살았다. 3개월쯤 지나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에, 언제 개학하게 될지 알아보기 위해 남의 트럭 꽁무니 타고 서울중학교에 다시 갔다. 학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서있자니 영어선생이 나오셔서 같이 일하자해서 미군 부대에서 접시 닦는 일을 했다. 1달 지나니 미군이 후퇴를 하는데, 한국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자기들만 내려가려했다. 사정사정해서 미군 꽁무니에 붙어서 부산까지 갔다.

 

3번의 뺑소니 인생 돌아보며

당시 남한에 사는 젊은이들은 모두 국군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학교에 등록하면 징집이 보류된다 해서 월급을 모두 털어서 학교 등록을 했다. 돈 있고 권세 있는 집 아이들은 부산에 와서 대학에 다니며 군대에 안 갔다. 김낙중 선생은 밤에는 부산 부두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매일 다친 사람, 죽은 사람이 기차로 실려 오는 것을 봤다. 그런데 1953년에 휴전을 하려니까, 이승만 박사가 고교생과 대학생을 동원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를 시켰다. 권세 있는 사람들 자식들은 공부한다며 뒷전에 두고 전쟁을 하자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세 번 뺑소니를 했어. 의용군 뺑소니, 군군 뺑소니,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 뺑소니. 그렇게 뺑소니를 하고 산에 올라가서 생각했지. 너는 도대체 뭐냐? 초등 동창은 의용군으로 죽고, 중학교 동창은 국군으로 죽었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결핵에 걸려서 죽는다 할 때는 진실이 뭔지 알 때까지 죽지 않겠다고 목욕재계하고 손도장을 찍으며 오직 참되게 살겠다고 맹서했는데 매번 뺑소니하면서 살고 있다니!" 이렇게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참된 사람의 길을 찾아 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눈물이 없어"

동족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고도 형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서로 죽이자고 전쟁하자는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목사들 신부들 스님들 그 누구도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김낙중 선생은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죽음을 결심하고 홀로 ‘전쟁반대 평화통일"을 외쳤다.

 

"사람들이 피가 철철 흐르고, 다리를 절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아니야. 그런데 사람들이 눈물이 없어. 눈물이 있다면 서로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교과서에 나온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처럼 <탐루(눈물을 찾는다)>란 등불을 들고 부산 광복동 길을 걸어다녔다. "전쟁을 반대합니다." "눈물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소리치고 다니니 구걸하는 사람으로 알고 동전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1시간 만에 경찰에 끌려갔다. "김일성이는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데, 휴전을 반대하면 빨갱이를 도와주는 거 아니냐. 악마는 없애버려야지. 도대체 네가 말하는 평화적 통일방안이 뭐냐?"

 

▲프레시안에서 인터뷰하시는 김낙중 선생.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청원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1년 동안 서울대 사회학과에 도서실에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남과 북이 같이 살 수 있는가"하는 길을 연구했다. 그것이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이었다. 이 방안을 정식으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청원서로 제출했다. 그 일로 치안국 중앙분실에 끌려갔다. "누가 만들어준 것은 누구의 지시로 이것을 경무대에 냈냐"고 고문하고, 정신병자로 몰았다. 치안국에서 풀려나온 이후 ‘북에서는 전쟁준비만 하고 있다는데, 내 통일방안을 가지고 가보자."고 결심했다. 이것을 선생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헤엄 치고, 가재 잡으며 놀던 강이 임진강이어서 그냥 갔다는 것이다. 달랑 에어매트리스 하나에 몸을 싣고 북으로 갔다. 그런데 북에서도 남조선 간첩이라는 죄로 기소되었다가 1년후 재판 없이 남한으로 송환조치 되었다. 철도길 따라 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왔다. 미군에 이어 남산 치안국에서 숱한 고문을 받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과 북을 오가며 선생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강력한 외세를 업고 권력를 확장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국민들 삶에는 관심이 없어."

 

이후 선생은 고려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하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정권은 북한에 갔다 왔다는 것을 빌미로 선생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간첩예비죄로 여러 차례 감옥에 보냈다. 그 징역살이가 18년이다. 그러나, 선생의 삶은 강이 쉬지 않고 흐르듯 평화통일을 향해 계속 흐르고 있다. 아직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회의원 시민단체 협의회", ‘평화통일 시민연대"의 고문을 맡아 활동하고 계시며, 2년 전에는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책을 출간했다.

 

▲남북화해협력을 도모하는 (사)좋은벗들 10주년 기념식에서.

 

통일은 인류문화를 위한 ‘또 하나의 등불"

이제 김낙중 선생은 평화 통일 운동을 넘어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얘기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없애려 한다면 모두 공멸한다. 더불어 사는 길을 찾아야만 살지, 어느 한 쪽을 악마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류문명은 두 바퀴로 달려왔다. 자연을 정복하는 도구의 발달과 인간을 정복하기 위한 무기의 발달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문명은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의 자유를 억압해왔다. 이제 이 문명의 전환점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바른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개체가 아니라, 가족, 씨족, 부족, 나라와 같은 겨레 속에서만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모든 생명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남과 북이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은 지구촌에 새로운 인류문화 창조를 위한 ‘또 하나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김낙중 선생은 확신한다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중에서).

 

통일에서 평화로, 평화통일에서 인류문명의 전환으로 선생의 철학적 사유는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 그의 탐구는 3번의 뺑소니를 반성하고 자른 그의 손가락을 매일 마주 대해야 했듯이, 단 하루도 쉬지 않았을 것이다.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길에, 선생은 1회용 컵을 재활용한다고 가방에 담았다. 그 가방은 아주 오래되어 위쪽에 구멍이 있었다. 선생의 말 한 마디 하나 하나가 그대로 실천임을 낡은 가방이 말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선생의 모습이 그대로 <탐루>라는 글씨를 쓴 등불이었다.

 

 

주요저서 [한국노동운동사], [굽이치는 임진강], [사회과학원론],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가 있다. 김낙중 전기 [탐루]-맏딸 김선주 글

 

 

글 · 사진 임현주 기자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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