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㉔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박영숙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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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형제가 아니냐?"
이제 곧 추석이다. 명절을 맞이하며 당장 떠올리게 되는 것은 헤어져 있었던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못보고 지냈던 가족들이 모두 만나 한솥밥을 먹고 식구가 되는 날이다. 못난 놈, 잘난 놈,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서로 안부를 나누고, 삶을 나눈다.
10월말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앞둔 올 추석.
추석을 맞아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어린 시절의 추석 이야기도 회상하면서...그래서 찾은 곳이 ‘추석맞이 이산가족 합동 위령 미사"를 지내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었다. 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실향민들의 뜻으로 시작되어 세워졌고, 또 매주 토요일 4시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기원 미사"가 열리고 있어 의미가 깊게 다가왔다.
추석맞이 이산가족 합동 위령 미사, 가장 중요한 일이 형제애의 회복
"이산가족 상봉이 이제 10월말에 이루어집니다. 이산가족 상봉은 꼭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의 일이고 인도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 의정부교구의 이기헌 주교의 말씀이 있었다. 이날 합동미사는 의정부교구의 15명의 신부들이 함께하는 큰 미사였다. 성당 앞쪽부터 중간까지 대체로 나이드신 분들이 많았다.
▲추석맞이 이산가족 합동위경미사
이주헌 주교는 성경에 나온 형제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곁에서 늘 착실하게 일하던 형과,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환영하며 잔치를 열자 형이 아버지에게 항의를 한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 잔치를 벌여주지 않았는데, 어째서 방탕한 동생을 위해서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는 것입니까?"라고. 이에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형제가 아니냐? 아버지의 넓은 가슴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라. 너희는 형제다. 잘못한 일을 용서하고 손을 잡는 것이 형제애이다." 이런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주헌 주교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조상을 가진 우리가 그렇게 오래 서로 만나지 못하고 반목하고 지낸 것은 그동안 우리 안에 형제애가 자리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형제는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도와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분단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 형제애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 합작 모자이크화가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
이 성당은 10여 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처음에 고향을 떠난 사리원 신우회가 [한민족 복음화 추진운동본부]를 결성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터를 샀지만, 일을 추진하기 어려워서 서울교구에 이 터를 기탁하였다.
이후 서울교구에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2004년에 건립추진위가 발족하였다. 성당을 짓다가 중간에 중단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2년에 의정부교구로 소유가 넘어오면서 일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 성당의 이름은 김수환 추기경의 뜻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추기경은 "남북간에 전쟁을 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했던 상처를 참회하고 속죄해야 화해와 일치가 가능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늘 하셨다. 그래서 성당 이름을 ‘참회와 속죄의 성당"으로 지었다고 이은형 신부가 전했다.
▲한반도 평화의 성모자(심순화 작품)
이 성당은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예수성심성당'을 모델로 한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와 프러시아가 서로 형제들을 죽인 것을 참회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것처럼. 성당 외양은 신의주 진사동 성당을, 내부는 성 베네딕트회 덕원 수도원 성당을 모델로 했다. 성당 제단 벽면에 있는 반원형 모자이크화는 남북합작 작품으로 의의가 크다. 이것 때문에 성당이 남북합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 모자이크화는 남한 작가들의 밑그림에 북한 평양 만수대창작예술단 소속 작가 7명이 중국 단둥에서 작업한 것을 배편으로 옮겨와 설치한 것이다. 황해도 출신인 성 우세영(알렉시오)과 충청도 출신인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등 남북의 대표 성인들이 '그리스도 왕'을 가운데 모시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는 월요일을 빼고 매일 11시에 미사를 드린다. 오두산 전망대나 임진각을 찾아 먼 발치에서나마 고향을 보려는 사람들의 위안이 되고자 매일 미사를 드린다 했다. 금요일 11시에는 성당안 봉안실(납골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제단이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져있다. 심순화 작가가 바친 ‘한반도 평화의 성모자", 제단의 전통문양 등등 성당 곳곳이 세심한 정성으로 가득 차있었다. 합동미사를 들어서인지 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형제애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통일기원 토요 미사에 한 번도 안 빠진 박영숙 할머니
매주 일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금촌역에 내려서 900번 버스를 타고 ‘참회와 화해의 성당"(왕복 4시간) 통일미사에 나오시는 할머니가 있다. 그 분이 바로 박영숙 할머니이시다.
할머니는 이 성당이 시작한 이래 ‘한반도 평화와 통일기원" 토요 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다. 1930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18세에 남으로 내려와 20세에 6.25를 맞았다는 할머니는 맨 앞줄에 앉아계셨다. 조그만 체구에도 아픈데 하나 없다면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필로매나 박영숙 할머니의 일과는 일주일 내내 기도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저녁 8시, 수요일은 7시에 광화문에서 세월호 미사에 참여하고, 목요일에는 본당인 일산성당. 토요일에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하셨다.
보통의 86세의 할머니가 갖기 힘든 열정 아닌가 싶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미사에 나오시는 이유가 뭐예요?"
"남북통일 해달라는 거지."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의 '참회와 속죄'의 성당.
"통일해야 잘 살아."
박영숙 할머니네 집안은 할아버지 윗대에서부터 꽤 잘 사는 집이었다. 평안남도 덕산면 하산리 30리 안에는 남의 땅이 하나도 없다는 집이었다. 어머니 말로는 독립운동 자금도 댔다고 했다.
해방이 되었는데 잘사는 사람을 내쫓아서 사변 전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평양에서 치과 의사 하던 오빠 둘도 내려오고, 언니는 회현동에 자리 잡아 장사를 했다. 6.25때 대구로 피난 가서 외과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알게된 군인과 24살에 결혼했다. "그 때는 20살만 넘어도 노처녀라 했어. 어른들 보는 눈이 있겠지. 부모말 듣는게 낫겠다 싶어 결혼했어." 당시 남편인 소위 월급이 9,000원이었다. 남편은 이 월급도 안 갖다주고 외상도 많이 했다. 결혼 전부터 언니 심부름으로 양복기지 사다가 동대문에 납품하는 일을 했는데, 이 장사 밑천으로 땅 사서 군부대 음식찌꺼기 갖다 돼지 키우며 살았다. 남편이 강원도 양구로 발령을 받아 춘천으로 이사했는데, 그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박영숙씨 나이 37세. 그에게는 5세, 8세, 10세, 13세의 네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 살던 춘천 땅을 못내 아쉬워한다. "박정희 쿠테타가 나면서 구획정리를 했어. 보상을 안해주려고 구획정리라 한 거지. 우리 땅 가운데를 쩍 갈라서 길이 나버린거야. 그 때 땅이 1/3이나 뺏겼어."
땅을 뺏기고나서 언니가 원단 장사하던 동대문종합시장으로 왔다. 당시 노임 전표를 할인해서 샀다 팔기도 하고, 일본에서 불도저 들여와 장비대여도 했다가, 동대문에서 포목장사를 20년 하면서 아이들을 다 키우고 시집 장가 보냈다.
포목집을 정리하고, 성동구치소로 재소자 봉사를 30년간 다녔다. 매주 목요일마다. 오래 봉사하다보니 마약 먹고 들어온 사람, 도둑질하다 온 사람들이 다시 또 교도소에서 만나게 되는 일이 많아서 더 열심히 봉사했다 한다. 그리고 지금도 군정후원회 등 9개 단체에 다달이 후원금을 내고 계신다.
"나는 건방지고 못됐어. 혼자 산다고 깔보잖아. 그래서 남의 말 안듣고, 건방져. 참을성도 없고 욕을 막 해." 먹고 살기 힘든 전후를 홀 몸으로 네 아이를 키우느라 얼나마 악착같이 사셨을까? 그래도 한 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집안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오늘도 호청 삶아 빨아서 이불 꼬매야하고, 저녁에 광화문 가야하고 해서 바쁘시단다.
"일주일에 3번이나 광화문에 왜 가세요?"
"세월호 해결 안 됐으니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러 가는 거야."
할머니가 또 당부한다. "통일해야 잘 살아. 내가 어디 출신 사람이고 상관 없어. 통일해야 잘 살지. 나는 평양에 가고 싶지만, 정치 때문에 가기 싫어." 할머니의 마음이 실린 당부가 가슴에 와 꽂힌다.
글 · 사진 임현주 기자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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