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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⑪ 춘곡 정탁 묘역

입력 : 2016-12-08 17:22:00
수정 : 0000-00-00 00:00:00

 

조선 개국 1등 공신, 정탁 

 

●문화재명: 춘곡 정탁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73호) 


▲ 춘곡 정탁 묘(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산 15번지): 고려 시대 묘제 형식으로 네모지게 조성되었고 봉분 앞에 ᄃ자 모양의 호석을 둘렀다.

 

장수 황씨 묘역 답사를 마지막으로 탄현면의 역사 유적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파주가 워낙 넓고 유적과 유물도 많아서 소개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을 기약한다. 

 

장수 황씨 묘역을 빠져 나와 다시 엘지로에 진입하여 월롱 방면으로 가다 보면 춘곡 정탁 묘역이라는 작은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정탁이라는 이름이 매우 생소할 수 있겠다. 정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인물로 호가 춘곡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자.

 

불교를 배척하는 김초를 변론하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의 일이다. 김초라는 인물이 고려의 불교 정책에 불만이 많아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공양왕은 몹시 노하여 김초를 죽이고자 하였다. 임금에게 노여움을 살까 봐 침묵하던 신하 중에 병조좌랑 정탁이 나서서 상소하였다.

 

“폐하, 김초는 단지 삼강오륜에 위배되는 불교를 비판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김초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삼강오륜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정몽주가 정탁의 의견을 거들었다.

 

“폐하, 유학자라면 누구나 불교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군왕은 신하의 직언을 널리 구하는 법입니다. 김초는 신하로서 직언을 했을 뿐입니다. 청컨대,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군왕의 신의를 보이소서.”

 

정탁과 정몽주의 변론함에 따라 김초는 태형 40대로 감형되었다.

 

이방원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죽이게 하다

정탁과 정몽주는 똑같이 유학을 숭상했지만 정치 노선이 달랐다.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고자 했고, 정탁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새 나라 건설에 걸림돌인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 주저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홀로 고심하던 차에 정탁이 찾아왔다.

 

“백성을 살리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왕후장상(제왕, 제후, 장군, 재상을 아울러 일컫는 말)의 혈통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정탁의 방문과 충고는 이방원으로 하여금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후 이방원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다.

 

개국 공신 1등에 책록되다

정몽주가 죽자 이성계 일파는 개국을 빠르게 서둘렀다. 나라를 어지렵혔다는 죄목으로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정몽주가 죽은 뒤 3개월 만에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 등극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은 하늘과 백성의 뜻을 미리 알고 도와준 사람들 덕분이오. 문하좌시중 배극렴을 포함하여 16인에게 일등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릴 것이오.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각에 모실 것이고, 벼슬과 함께 토지 및 노비를 나누어줄 것이며, 자손들은 비록 범죄를 저질러도 사면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탁은 1등 공신에 책록되어 토지 1백 70결과 노비 20구를 포상으로 받았다.

 

명과 외교 문제에 중심에 서다

조선은 건국 후 명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명은 조선이 보낸 외교문서의 글귀가 불손하다며 조선 사신을 억류하였다. 그 다음의 외교문서도 경박하다며 사신을 또 억류하였다. 명은 외교문서를 지은 정도전과 정탁을 보내라고 강요했다. 이에 조선은 하윤을 총책임자로 하여 다시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다. 정탁과 권근을 죄인으로 삼아 압송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황제 폐하, 글을 지은 사람이 모두 중국 발음을 할 줄 모르고 해박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옵니다. 어찌 감히 황제 폐하께 불손한 글을 올리겠습니까? 삼가 분부하신 대로 표문(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을 지은 정탁과 교정을 본 권근 등을 압송합니다. 정도전은 표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선의 사신들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탁이 표문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억류된 사신 중 하나가 정도전이 지었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데도 명나라는 정탁과 권근을 벌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외교마찰을 피하였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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