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콩달콩 이야기 7 - 김민기 뒤풀이의 뒤풀이
알콩달콩 이야기 <7>
김민기 뒤풀이의 뒤풀이
(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정진화
작년 7월에 김민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평화마을짓자와 여러 시민단체가 임진각 밤샘 평화 축제 ‘평화랑 뒹굴자’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소식을 듣고 한 시대가 저무는 듯한 슬픔에 젖어 내 젊은 날 거리에서, 모임에서 함께 불렀던 그 노래들을 반복 재생하여 듣다가 선생의 생애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덕분에 ‘평화랑 뒹굴자’ 공연의 주제가는 자연스레 선생의 노래들이 되었다. 가수 신형원이 참회와속죄의성당에 다니는 어린이들과 함께 부른 선생의 ‘철망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울림을 주었다.
김민기 선생은 우리나라 첫 싱어송라이터이다. 4천 회가 넘는 지하철1호선 장기 공연, 윤이상 백남준에 이어 독일 최고의 괴테메달 수상, 학전소극장을 세워 700여 명의 배우와 음악인을 배출한 분이다. 12년간 이어온 ‘지하철1호선’을 접고, 돈이 안 되는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한 사실이 방송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더 젊어서는 불온한 노래를 만들었다고 정권에 쫒겨 농사를 짓고 광부로 일하는가 하면 봉제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아침 공부를 가르치며 동고동락했다. 특히 연천의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지을 때, “하루 24시간이 살아있는 느낌이고 모든 게 좋았다”고 말씀하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한살림 초대 사무국장으로 장일순, 김지하와 함께 한살림 생협을 만들어 운영한 것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오목교 밑 판자촌에 신정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배움의 갈증을 풀어주고, 해송어린이집 건립을 위해 공연하고 오랫동안 후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민기 선생은 자신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필요한 일을 찾아 남다르게 해냈다.
어느새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었건만 추모 공연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공식 행사는 못하고,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 노래와 이야기 손님을 초대하여 조촐한 ‘김민기 뒤풀이’를 마련하였다. 토지문화관에서 선생을 자주 만났던 어떤 작가는 나이 든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선생처럼 좋은 의미든 아니든 전혀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같이 술을 마시면 장난기 어린 농담을 하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할 뿐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술도 비싼 술은 마시지 않으며 끝까지 평범한 서민으로 살았다.
선생은 철저히 무대 뒤의 ‘뒷것’으로 무대 위의 ‘앞것’들을 기본부터 가르쳐주었다. 당시 학전 운영시 문화계에서 최초로 예술인들과 근로계약서를 쓰고 개런티를 보장해주었다. 이 일로 연극인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증언을 보면, 선생은 예술인들이 일에 전념하도록 생활을 안정시키는데도 진심이었던 것 같다.
선생은 어떤 목적을 갖고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며, 노래는 부르는 순간 나의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것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독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붓을 꺾으려고 할 때, 다시 그 길을 가도록 위로하며 힘이 되어주기도했다. 어린이를 좋아한 선생은 아이들의 웃음을 보려고 어린이 연극을 할 때마다 공연장에 내려가 보았다한다. 그래서 빚을 져가면서도 어린이 연극단을 오랫동안 이끌어오셨다.
몇 번씩 기관에 붙들려가 흠씬 얻어맞다 보면 통증이 없어질 때가 오는데, 그러면 때리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김민기 선생!
그의 낮은 음성이 그립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없이 겸손하던 노랫말이 가슴에 따뜻하게 번져간다.
그의 노래는 동시대를 살았던 날들을 뜨겁게
기억한다. 아름다운 사람 김 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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