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2) 경계에서 찾은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3) 서유구의 장단 생활, 허비를 마다 않은 삶
수정 : 0000-00-00 00:0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2)
경계에서 찾은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3) 서유구의 장단 생활, 허비를 마다 않은 삶
▲임진강 잉어잡이를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1931)
“얼음에 구멍을 뚫고 멍석과 짚을 깔고 빙상에 누운 후 일대는 상류에 올라가서 떡메 같은 망치로 얼음을 울린다. 울리는 소리에 놀란 잉어 떼는 아래로 밀려, 모여 누운 일대는 떼를 지어 달아나는 잉어를 찍어낸다. 이 잡는 방법을 방친다고 한다.(「명산물과 고적의 임진강순례」 동아일보. 1931.10.31.)”
임진강 고유의 겨울 잉어잡이 방식인 일명 ‘방치기’를 소개한 기사다. 이 풍습을 소개한 더 오랜 기록이 있다. 1820년의 기록이다.
“얼음이 꽁꽁 언 뒤에는 물 깊은 곳에 나아가 얼음 구멍을 뚫고 수인이 몽둥이를 가지고 얼음을 두들겨 깨고 물고기를 몰면서 한 사람은 장대를 가지고 구멍 속으로 엿보다가 물고기가 지나가면 장대를 쥐고 바로대고 찍으면 뜻대로 되어, 아가미나 등에 관통한다.(서유구. 「전어지」 중에서)”
서유구는 자신의 저작 ‘난호어목지’를 통해 얼음을 뚫고 잉어를 찔러 잡는 낚시 법을 소개한다. 잉어를 잡는 도구에 주목해 ‘자리법’이라고 표제를 붙였다. 난호어목지는 서유구가 난호에 정착해 살며 저술한 어류지다. 후일 전어지에 이때의 내용들을 옮겨 싣는다. 임진강을 실제 취재하듯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많다.
“깨나리 또는 세어는 위어와 비슷하나 그것보다 가늘고 작으며 몹시 잘 변한다. 오두에는 물살이 급해서 그물을 칠 수 없고, 봄에서 여름으로 바뀔 때가 되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와 낙하에 이르는데 이때 당망을 쳐서 잡으면 주머니 속을 더듬어 잡아내는 것 같다. 파주와 교하 사람들은 세어를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서유구. 「전어지」 중에서)”
깨나리는 싱어를 말한다. 연안바다에 살면서 기수역에 산란하는 어종이다. 깨나리는 분단 이전 임진강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던 물고기다.
“개나리라는 거. 그런 것도 임진강에 났어. 그게 엄청 맛있거든. 웅어 비슷한데 통통하고 짧고. 몸이 가늘지. 속이 들여다보여. 내장도 다 보이고. 지금은 안 나와. 못 보겠어. 그거만 먹었어.(파주시 사목2리 황정하. 1940생.)”
▲서유구 형제들이 모여들었던 동원(진동면 동파리)과 서명선 묘
서유구가 머문 난호는 임진강 북편 장단군에 있었다. 벼슬을 버린 서유구가 1815년 들어온 곳. 장단은 서유구 집안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묘향이다.
“동원(진동면 동파리)의 서쪽 20리를 학산(백학산)이라 하는데 우리 고조부 서문유 이하 3대의 장지다. 남으로 20리를 명고라 하는데 서명성의 장지다. 해마다 봄, 가을로 시제를 지내는데 우리 형제와 숙질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함께 와서 동원에 이르러 하루를 자고 서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갔다. 돌아갈 때는 다시 동원에 모여 술을 거르고 밤을 쪄서 이웃 노인들을 불러다가 술도 권하고 노래도 하면서 밤을 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서유구. 「동원정사기」 중에서)”
난호는 학산의 묘지에서 5리 떨어져 있고 작은집 명고와 이웃해 있었다. 묘향으로 들어온 그는 농사짓고 물고기 잡는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난호의 물굽이에 살면서 농사 대신 고기 잡아 생활했네. 비와 바람이 낚시터에 불어와도, 종일 동안 한 발짝도 뜨지 못했네. 피리며 자가사리 사방에서 모여, 먹이 물고 꼬리치더니 이내 달아나네. 옆에 있던 늙은 어부 서툴다 웃고는, 낚싯바늘 굽히지 않아서라 일러주네.(서유구. 「번계시고 기해편」 발췌)”
▲서유구가 묻혀 있을 백학산과 비무장지대.
그는 낚시 바늘도 굽힐 줄 몰랐던 초보어부였다. 촌로의 비웃음을 산 서유구는 스스로를 다섯 가지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라며 오비거사라 칭했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어류지를 내놓는다. 선비의 학문을 버린 삶, 인생의 허비를 마다 않고 주경야독한 결과였다.
“처사들이 이리저리 한 말은 그야말로 흙으로 만든 국이요, 종이로 빚은 떡이다. 세상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농사뿐이다.”
경학이야말로 인생의 허비다. 그런 믿음으로 이룩한 것이 ‘임원경제지’다. 그는 경학을 버리고 농사를 택함으로써 ‘흙으로 국을 끓이고 종이로 떡을 빚는’ 기적을 이뤄낸다. 이것이 기적인 것은 여전히 경학의 염력으로 국을 끓여 보이겠다는, 서울에 달라붙은 처사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서유구가 손발이 닳도록 누비고 묻힌 난호와 백학산, 또 명고는 비무장지대에 갇혀서 발끝 하나 들여 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가 풀려나와 모두에게 기적이 미치기를 기다린다. 혹 그의 마지막 거처마저 ‘종이떡’을 빚으려는 부류의 차지가 된다면 그것은 서유구만이 아니라 시대의 허비일 것이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44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