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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복지소사이어티 칼럼> 5살 아이의 죽음, 이는 국가의 폭력이다

입력 : 2023-05-22 01:48:27
수정 : 0000-00-00 00:00:00

5살 아이의 죽음, 이는 국가의 폭력이다

 

 

 

박민식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경제산업위원장)

 

생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최재천 교수는 다윈은 적자생존에 대한 치명적 실수를 했다고 지적한다. 적자생존은 영어로는 ‘Survival of the Fittest’이다. 원래는 다윈이 아닌, 영국의 경제학자인 허버트 스펜스(Herbert Spencer)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이를 그대로 다윈이 가져와 자기 책에 적용한다. 이 문구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최고(Fittest)가 되어야만 생존(Survival)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를 보면, 최고가 되어야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보다 조그만 나아도 멸종하지 않고 생존한다. 최고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친한 친구 2명이 산행을 하다 곰을 만난다. 생존하기 위해 두 친구는 정신없이 달아난다. 그런데 한 친구가 달리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신발 끈을 고쳐 맨다. 뒤 따라 오던 다른 친구가 곰이 쫓아오는데 도망가지 않고 뭐 하느냐고 한다. 다른 친구보다 발이 빨랐던 그 친구가 말한다. 

 

  “나는 곰보다 빨리 달리필요가 없다네. 자네 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된다네.”         

 

최적자 생존이 아닌 사회적 공존을

 

1등을 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Survival of Fittest'가 아니라 ’Survival of Fitter'가 맞다고 최 교수는 말한다. 그 말은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등만이 살 수 있다는 ‘최적자 생존’이 아니다. ‘사회적 적자생존’은 낙오자라 할지라도 함께 지켜낼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만 있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공존’이 될 수도 있다. 바로 복지국가의 지향점이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18;12)” 이 처럼 복지국가 이념의 뿌리는 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보편적 복지’는 방법론이기 이전에 철학이고 신념이다. 신념 없는 정치가의 혀 놀림이 아닌,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이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라고 최 교수는 말한다. 자연은 들여다보면 ‘적자생존’이 아닌 ‘공존’이다. 꽃과 벌이 그러하고, 개미와 진딧물이 그러하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손을 잡지 않고 살아남은 동식물이 없다. 모두가 손을 잡고 있다. ‘공존’이고 ‘공생’이다. 복지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 복지는 시혜의 자랑꺼리가 아니다. 복지는 인간이 인간다워 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인간 최대의 적이 인간이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기회다. 

 

복지국가는 국가시스템의 대전환을 의미

 

윤석열 정부는 지난 5월11일 코로나19 사태의 종식을 알렸다. 2020년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뒤 3년 4개월 만이다. 정말 종식인가? 바이러스의 창궐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 등 이 모두가 21세기에 발생한 바이러스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광동성에서 발생, 수개월 만에 홍콩, 싱가포르, 캐나다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신종플루는 2009년 3월말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서 발병, 이후 빠른 속도로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메르스는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코로나19는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생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다시 바이러스가 창궐할 주기가 5년? 3년? 일 수 있다고 해도 부정하기 힘들다. 윤석열 정부는 “새로운 팬데믹에 대비하여 과학 기반 대응체계를 착실하게 준비해 두겠다"고 한다. "새로운 팬데믹에 적용할 수 있는 백신 치료 개발 역량을 높이고, 국제 협력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한다. 결국 ‘과학 기반 대응체계’와 ‘백신 치료 개발 역량’이 대응 정책이다. 빠뜨린 것이 있다. 코로나19 동안 미국은 봉쇄를 풀자는 시위가 격렬했다. 인종주의나 국수주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게 문을 열고 생업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문제였다. 생존을 위한 시위였다. 반면 유럽에서는 시위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본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팬데믹에 대한 대응은 단순 의료 대응체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최재천 교수는 화학백신이 아닌, 근본적인 생태백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하준 교수는 복지시스템의 부실화가 코로나19 재앙을 키웠다고 분석한다. 국민의료보험이 없는 비효율적 의료복지 시스템의 미국의 피해가 컸던 이유가 그러하고, 보수 정권과 극우파 등장에 따라 복지축소와 재정 긴축으로 의료서비스가 부실화된 유럽 국가들의 피해가 극심했던 이유가 그러하다. 

 

복지국가는 국가시스템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복지국가 혁명이라 외쳤다. 출산, 보육, 교육, 고용, 주거, 의료, 부모부양, 노후보장, 환경, 생태 등 총체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고 대안이다. 수단으로서의 복지, 취약계층에 대한 시혜적 복지가 아닌, 국가 정책의 전면적 전환으로서의 복지, 지속가능한 성장 국가로서의 비전을 위한 복지, 모든 국민의 행복이라는 가치 실현을 위한 복지를 의미한다. 대전환, 실현가능한 비전, 국민 행복의 절대 가치. 이것이 복지국가다. 이상이 교수는 “복지국가는 철학, 정치, 경제, 복지, 노동 등 보통사람들의 행복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통합적으로 포괄한다”라고 말한다.

 

5살 아이의 죽음, 이는 국가의 폭력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모든 것이다. 서울 한 복판에서 5살 아이가 응급실을 헤매다 사망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부모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서울 한 복판에서 축제를 즐기던 159명의 젊음이 불가 몇 시간 사이에 영영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게 말이 되는가?  안전 불감증? 병실의 부족? 이유가 되는가? 부모는 모든 것을 잃었다. 국가는 왜 부모가 될 수 없는가? 운이 안 좋았다? 하필이면 그 때 병상이 가득차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사람들이 운집했다. 아니다. 그 ‘하필의 때’를 위해 국가는 존재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가천길병원은 소청과(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중단했다. 상급종합병원이다. 지난 2월 1일에는 인천성모병원이 소청과 응급실 야간 진료를 중단한다. ‘빅5 병원’이라 불리는 서울 내 종합병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서울병원 소청과는 모집 정원 6명 중 3명이 지원했다. 서울대병원은 14명 중 10명, 가톨릭중앙의료원은 13명 중 1명, 세브란스병원은 11명 중 0명 지원했다. 처참한 숫자를 기록했다. 지방대학병원은 전멸이다. 충북대병원과 전북대병원에만 각각 1명씩 지원했다. 전멸이다. 소아는 같은 질환이라도 진단과 치료 방식 등 모든 것이 어른과 다르다고 한다. 그만큼 전문적이며 중요성이 높다. 소청과가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로 묶이며 필수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아프면 안 된다. 그 ‘하필의 때’가 우리의 자녀에게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보건복지부는 달빛 어린이 병원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말 뿐이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현재로서는 정확한 재정 소요는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하반기에나 종합 대책을 발표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우리 아이 몇 명이 그 '하필의 때'를 조마조마 하며 피해 다녀야 하나? 밤 새워 아이를 살리려 온 병원을 헤집고 다닐 때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모 신문의 기사 내용이다. 지난 1월 밤 9시 50분경, 충북 청주시에 사는 7살 남자아이가 해열제를 먹고도 고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119 구급차를 타고 다니며, 12군데의 병원에 전화를 돌렸지만 모두가 진료를 거부했다. 충북대병원마저도 3시간의 대기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침내 먼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마침 소청과 전문의가 있었다. 아이의 열은 주사 한 대로 싹 사라졌다. 이 주사 한 대를 맞지 못했더라면? 그 하필의 때가 이 아이에게 짙은 그림자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기도 의정부시에 그 ‘하필의 때’가 다가갔다. 13살 여자아이가 급체로 구토 증세를 보여 종합병원을 찾았으나 진료를 받지 못했다. 119의 안내를 받고 서울의 상계백병원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도 대기 시간이 3~4시간이라고 안내받는다. 아이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결국 병원진료가 아닌 민간요법으로 오랜 고통을 감내하며 직접 치료를 했다. 산간벽지도 아니고, 격리된 아프리카 지역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아이는 몇 달 뒤 다시 고열로 인해 밤 9시경 달빛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불통이다. 밤 11시까지 운영하는 달빛병원이라 했으나 전화는 불통이고 다시 그 하필의 두려운  때가 다가 오는 듯 했다. 이미 소아 응급 체계는 중증환자뿐만 아니라 90%에 달하는 일반 진료 체계도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복지부 조규홍 장관은 지난 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대책을 발표했다. 중증 소아 진료에 대한 사후 보상, 어린이 공공전문병원 설립, 소아 심장 등 특수 분야의 의사 양성,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장관이 고장 난 녹음기처럼 복지부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을 연거푸 말하고 있다”고 날을 세운다. 어린이 공공전문병원은 설립된 곳마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실정이다. 소아 심장 등 특수 분야는 사명감과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지원을 할 수 있는 보상과 제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의대 정원만 확대한다고 역시 소청과를 지원할 것인가? 연봉 3억6,000만원을 준다고 함에도 산청군보건의료원 채용에 지원자가 없던 것이 현실이다. 의사들이 속물이기 때문에? 사안은 단순하지 않았다. 의료체계가 제도적으로 갖춰지지 않은 지방행정의 한계가 고스란히 전가되는 체계 문제도 숨겨져 있었다. 의료사고에 대한 개인적 책임, 근로계약서의 부재, 상황에 따라 주말, 휴일, 야간 등 응급 환자에 대한 대응. 보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책임의 무게가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전가되는 게 문제였다.

 

임현택 회장은 대안으로 저출산·어린이 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대통령 직속 어린이청 신설을 제시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운영 중에 있으며, 일본 역시 올해 상반기 설립 예정이라고 한다.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의료와 보건서비스는 기본적으로는 공공재다. 자유시장의 원리가 적용되어선 안 된다. 18~19세기의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공공재의 공급조차 시장 논리에 맡긴다. 자유 시장 원리에서 깨끗한 물과 하수처리를 위한 상하수도 시설조차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한다. 그 결과, 불결한 환경으로 전염병과 각종 사회적 질병이 창궐한다. 국민 안보를 위한 국방서비스와 마찬가지로, 국민 생명을 위한 의료서비스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국가 통치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 ‘하필의 때’가 불안한 이유는, 제도와 정책의 부재가 아닌 철학과 신념의 부재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년 ~ )은 두 종류의 폭력을 말한다.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이다. 주관적 폭력은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행위’다. 객관적 폭력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된다. 바로 국가의 체제에 의한 폭력이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은 겉으로는 한 나라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듯 할 때 나타난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의 모든 것이었다. 5살의 아이가 서울 한 복판에서 응급실을 헤매다 사망했다. 서울 한 복판에서 축제를 즐기던 159명의 젊음이 단 몇 시간 사이에 영겁의 시간으로 떠났다. 이는 보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이었다.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분노의 폭력이 일어난다. 청년들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문제는 드러난 그들의 주관적 폭력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국가의 폭력이 문제다. 청년의 미래가 없는 것도 국가의 폭력이다. 어떻게 국가의 폭력을 멈출 것인가?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나는 여전히 윤석열 정부에 대한 성공을 기대하고 바란다. 그래서 묻는다. 이 정부의 철학은 무엇인가?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복지국가는 방법론이기 이전에 철학이고 신념이다. 신념 없는 정치가의 혀 놀림이 아닌,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러한 철학과 신념으로 15년 넘게 정책적 대안 만들기 헌신했다.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과 대안들이 산고의 고통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애정을 가지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홈페이지를 찾아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다시 반복한다. 복지국가는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라는 말처럼, 경쟁이 아닌 공존의 신념이다. 복지국가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며, 시혜의 자랑꺼리도 아니며, 국민의 존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우리 세대에 주어진 사명이다. 최고만이 생존하는 ‘Survival of Fittest'가 아니라,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적 생존, 즉 ’Survival of Fitter'를 위한 기회다. 1992년 빌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상이 교수는 이에 빗대어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고 외친다. 정치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어떤 정책적 대안도 실현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바로서야 한다. 그래서 끝으로 사회학자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말을 빌리며, 다음세대와 청년들에게 구한다.

 

“인류의 진정한 지옥은 사회적 비전이나 꿈의 실패, 폭력과 잔인함의 폭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 공동체의 망가진 능력에, 우리의 옹색해진 인간적 유대에, 얼음 같은 무관심으로 변해 버린 사랑의 죽음에 존재한다.”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불신 때문에 정치적 수단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 복지국가라는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실현할 동지들이 되어주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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