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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㉒ 영조의 지극 정성, 화평옹주

입력 : 2017-05-22 17:48:00
수정 : 0000-00-00 00:00:00

 

영조의 지극 정성, 화평옹주

 

● 화평옹주 및 박명원 묘(파주시 향토 유적 13호


▲ 화평옹주와 박명원 묘(파주문화원, 파주시 파주리 산 57-1)

 

파주 향교에서 되돌아 나와 주내 삼거리에서 주라위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약 100여 미터 지나 우측으로 군부대가 두 곳 있다. 두 번째 군부대 안에 화평옹주와 박명원의 묘가 있다. 답사를 하려면 먼저 사단 본부에 연락하여 협의하는 게 좋다. 무작정 갔더니 체육대회가 있다고 안 된다고 한다. 부대 입구에 있는 박명원의 신도비까지만 확인하였다. 어쨌든 화평옹주의 생애를 살펴보자.

 

마마를 앓았으나 건강을 되찾다

영조는 1724년 군왕에 올랐을 때 후궁인 정빈이씨 소생의 경의군(효장세자, 현재 파주3릉 중 영릉)와 화순옹주를 두고 있었다. 왕비인 정성왕후에게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기에 경의군과 화순옹주를 지극히 사랑했다. 집권 3년째인 1727년 또 다른 후궁인 영빈 이씨에게서 딸을 얻었는데, 이 딸이 바로 화평옹주이다. 화평옹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효장세자가 죽자 영조의 사랑은 옹주를 향했다. 화평옹주가 5살 때 마마를 앓아 병석에 누웠다.

“범죄에 대한 신문과 죄인을 죽이는 일을 모두 멈추어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화평옹주는 마마를 털고 일어나 건강을 회복했다. 화평옹주는 밑으로 여러 명의 친동생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만이 제대로 장성했다.

 

박명원과 혼인을 했으나 궁에서 살다

화평옹주는 성풍이 온화하고 유순하였고 행실도 조심스러웠기에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화평옹주는 맏이로서 형제 사이를 도탑게 했다. 영조는 왕실의 법도에 따라 화평옹주를 혼인시키고자 했다.

“여봐라, 옹주의 혼기가 찾으니 마땅히 혼인을 시켜야겠다.”

“전하, 예조참판 박사정의 아들이 괜찮을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화평옹주는 12살 되던 해(1738)에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은 박명원과 혼인하였다. 박명원은 화평옹주와 혼인함에 따라 금성위로 봉해졌다. 옹주가 혼인을 하면 궁궐을 나가야 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화평옹주와 박명원은 궁에서 생활했다.

 

영조와 사도 세자의 사이를 좋게 만들다

화평옹주는 17살이 되자 궁을 나가 사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영조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입궐하여 부모님께 문안을 올렸다. 화평옹주는 형제들 중에서 자신이 유독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이 질투하지 않도록 잘 조절하였다.

“옹주가 왔구나! 이렇게 예쁜 내 새끼가 왔어! 하하하.”

“아바마마, 저를 아껴 주심이 지나치시옵니다. 세자가 있으니 그리하지 마소서.”

화평옹주는 영조가 자신을 편애하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사도 세자가 실수를 하면 감싸 주었고, 사도세자에게 화가 나 있는 영조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사도세자는 이를 알고서 누나인 화평옹주를 따랐다.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화평옹주는 22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병을 앓아누웠다. 자신이 오래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아버지인 영조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님, 너무 아파서 다시는 천안(용안)을 뵐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지를 받은 영조는 의장을 갖추지도 않고 궁을 나와 화평옹주의 사가로 향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화평옹주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조는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슬픔을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옹주야, 내 딸아!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냐? 하늘이시여, 어찌 이렇습니까?”

영조는 화평옹주의 시신을 앞에 두고 밤을 새워 통곡하였고 날이 밝아서야 환궁하였다. 또한, 염을 할 때에도 친히 나아가 예를 다하였다. 이를 두고 신하들은 옹주의 상에 대해 군왕으로서 지나친 행동이라고 간언하였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조차도 과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아니라 부모로서 영조의 행동이 지나친 것일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아무튼 화평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이 사무쳤다. 화평옹주가 죽은 뒤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문산읍 사목리 묘소)에게로 옮겨 갔다.


▲ 박명원 신도비: 박명원은 글씨를 매우 잘 썼다고 알려져 있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팔촌동생인 박지원을 수행원으로 추 천 하 였 다 . 이 에 따 라 박 지 원 은 중국 여 행 을 한 뒤 그 유 명 한 『열 하 일 기 』를 남기게 된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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