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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⑰ 옹주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화완옹주

입력 : 2017-03-16 15:15:00
수정 : 0000-00-00 00:00:00

 

옹주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화완옹주 

 

●문화재명: 화완옹주 및 정치달 묘(파주시 향토 유적 14호) 


▲ 화완옹주 묘역(파주시청, 문산읍 반구정로 46): 상석 아래쪽으로 장명등이 놓여 있었는데 도난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성임 묘에서 되돌아 나와 문산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임월교를 건너서 좌회전하여 반구정 방향으로 약 2km 정도 오면 사목 삼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오른쪽 언덕쯤에 화완옹주와 그의 남편 정치달의 묘가 있다. 정치달은 화완옹주와 혼인한 뒤 얼마 안 되어 후사가 없이 요절했기에 그의 행적은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화완옹주는 영조가 끔찍이도 예뻐한 딸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

 

영조로부터 편애를 받다

우리 속담 중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조 임금은 자식에 대한 편애가 지나쳤다. 그중 영빈 이씨에게서 얻은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유별나게 사랑했고, 동복의 자녀인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특히 미워했다. 화평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누나이고,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다. 화평옹주는 영조에게 자신을 너무 편애하지 말라면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더 좋게 만들려고 애썼다. 반면, 화완옹주는 언니인 화평옹주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뒤에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우리옹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새끼”

“저도 아바마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남편과 딸을 잃고 과부가 되다

화완옹주는 12세에 정치달과 혼인하고 15세에 궁궐을 나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서 19세에 딸을 낳았다. 그런데 불행은 겹쳐서 오는 법이다. 낳은 딸이 5개월 만에 죽었고, 딸이 죽은 지 1개월 만에 남편 정치달도 급사하였다. 공교롭게도 정치달이 죽던 날에 영조의 첫째 부인인 정성왕후도 세상을 떠났다. 화완옹주와 영조에게 동시에 불행이 닥친 것이다. 영조는 화완옹주까지 어찌될까 두려웠다.

“여봐라, 화완옹주를 궁궐로 불러 살게 하라.”

“아니 되옵니다. 유교의 법도에 맞지 않사옵니다.”

출가한 왕녀는 남편이 죽더라도 궐 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영조는 화완옹주를 궁궐로 불러 들였다. 영조는 화완옹주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

 

사도세자의 뜻을 영조에게 전하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훗날 왕위를 잇는 정조의 고모이다. 화완옹주가 궁에 돌아왔을 때에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엄하게 대하며 미워했다. 그러자 사도세자는 화완옹주에게 노골적으로 질투했다.

“너는 아버지 사랑을 극진히 받고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

“오라버니, 제가 잘 할게요.”

화완옹주는 친오빠인 사도세자의 뜻을 아버지인 영조에게 알려서 이루게 했다. 사도세자를 위하여 영조의 숙소를 경희궁으로 옮기게 하였고, 사도세자와 영조가 함께 명릉(숙종의 릉)에 참배하도록 권하였으며, 사도세자가 온천 여행을 떠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에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다. 세간(드라마 따위)에서는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중록』 등의 기록에는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도와주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막다

화완옹주는 나이 어린 세손(정조)과 함께 경희궁에서 생활하면서 정을 키웠으나 세손이 성장하면서 점차 멀어졌다. 자신의 양아들인 정후겸을 앞세워 오히려 세손을 견제하였다. 화완옹주와 정후겸은 영조의 편애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영조는 늙고 몸 상태가 나빠지자 세손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명하고자 화완옹주를 불렀다. “내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겠구나.”

그러나 화완옹주는 영조의 뜻을 신하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모른 척하였다. 영조가 재차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나서자 홍인한(정조의 작은외할아버지)이 강력히 반대하였다. 화완옹주와 정후겸도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서인으로 강등돼 ‘정처’로 불리다

그러나 세손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었고, 그 후 3개월 만에 영조가 죽었다. 군왕이 된 정조는 자신의 대리청정을 막은 이들을 응징하였다. 정후겸과 홍인한은 유배를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고, 화완옹주는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파주로 옮기게 했다. 화완옹주는 옹주의 신분을 잃고 대신 서인으로 강등되어 ‘정처(정치달의 처)’로 불렸다.

“그래도 화완옹주는 선왕께서 예뻐하신 딸이니 유배 보내는 걸로 처형을 대신한다.”

정조는 화완옹주를 관대하게 대하였고 결국에는 죄를 풀어주었다. 정조에 이어 순조도 화완옹주를 비호하였기에, 화완옹주는 천수를 다하여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정치달의 묘 옆에 묻혔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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