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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74) 해마루촌 주민 김인수 교수

입력 : 2018-05-09 10:22:00
수정 : 0000-00-00 00:00:00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74)
해마루촌 주민 김인수 교수


“이제부터 내 생일은 4월27일 입니다.”




 


각득기소(各得其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한다는 뜻으로 본인의 능력이나 적성에 맞는 자리에 거취를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말해주는 사자성어이다. 그 시발은 논어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오자위반로 연후락정 아 송 각득기소’(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라 하여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로 잡히고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잡았다는 데서 전해지고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놓여 있어 빛나는 자리가 있다. 거취란 것은 위치와의 조합으로 세상의 질서를 만들거나 지켜지고 보존 돼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높여주기도 한다.
여기 ‘파주’란 곳의 지명과 자신의 나머지 생을 조화시키기 위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파주민통선의 해마루촌으로 이주한 이가 있다. 김인수 교수.
2018년 4월 27일을 본인의 새로운 생일이라 말하는 이가 바로 그이다.


“분단 65년은 사실 찰나와도 같은 것이거든”
2018년 4월 27일 한반도의 역사가 찍은 평화의 방점에 온 국민이 환호했던 순간.
오로지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에의 염원으로 한 생을 비껴섬 없이 관통해 온 김인수 교수, 그는 말했다.
“이것 봐, 이런 날이 오잖아. 벼락같이 오잖아. 5000년 이 나라 유구한 역사로 보면 분단 65년은 사실 찰나와도 같은 것이거든. 잠시 쪼개진 역사거든, 아무 것도 아니거든. 열린 마음 그 하나면 이렇게 하나가 되는 길이 열리는 일이었거든”
안경 너머 그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으나 그 눈빛은 더욱 또렷이 TV를 향하고 있었다.
4.19혁명 이 후,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억압 받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그 군부독재의 세상에서 그늘이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김인수. 그리고 국민의 정부 시절 청춘을 바친 통일에의 꿈. 곧 실현될 것 같던 그 꿈이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늦어질 때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날이 올 것에 대한 한 치의 의구도 품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2003년 경 그렇게 그의 청춘을 바친 ‘정치적이었던 생’에도 위기가 찾아 왔다. 건강이 적신호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 때의 그가 가장 깊게 고민한 것이 바로 각득기소,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일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지,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어. 서울에서 40km남짓, 평양까지 140km. 대립된 이념의 실체를 바라보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 파주민통선의 해마루촌 여기만큼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대한민국엔 없을 것 같았거든”
그렇게 김인수 교수는 파주인으로서 해마루촌에 깃들게 되었다고 한다.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은 ‘나누는 것’

하필이면 왜 해마루촌인가, 긴장의 대명사로 알려진 도시, 파주로의 발걸음을 보며 주변 지인들은 걱정했지만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접경지역이 가진 특성상 반공에 길들여진 민통선 내의 주민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의 하루가 의미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냥 사람들과 만나는 거지,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 나누다보면 안타까웠어. DMZ 이 땅이 갖는 의미보다는 그저 빨갱이 타령에 길들여진 사람들 보면 답답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이 여기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니까. 나라에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이 곳 사람들은 없으니까. 너무 당연한 것이거든”
그의 농막으로 여럿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의 방문에도 그는 늘 최선을 다한다. 커피를 타고 과일을 내어주고 물 한 잔을 대접한다.
‘나누는 삶’의 실천이 삶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 몸에 베인 모습이다.
“나누고 배려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야, 하물며 역사라고 생각하면, 국가라고 하면, 멋진 일 아냐? 더 가진 이가 마음을 열어주는 거지. 오늘 삶이 폭폭한 이들이, 나라가 어떻게 주변을 돌아봐. 손 내밀어 주고, 다독여 줘야 하는 자리, 거기 자신이 있다는 것에 내 나라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거지.”


사람을 키우고 꿈을 키우는 허준농장
‘허준농장’이라는 명패가 놓인 그의 농장엔 여러 작물들이 관리되고 있다. 부지런한 그의 손을 타고 올 봄도 진즉부터 농장의 한 쪽엔 텃밭이 일궈지고 있다. 무엇을 재배하는 농장이냐는 질문에 그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사람을 키우고 꿈을 가꾸는 농장이지,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민통선 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람을 키우고 꿈을 키우는 농장. 전 세계 유일한 분단의 역사라는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현실을 딛고 있는 자리에서 그 이념의 상징인 ‘철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평화순례길’에 대해 그는 이야기 했다.

“65년이야 역사의 큰 틀로 보면 별 것 아닌 세월이라 말했지만, 그 안에서 고통 받은 이들의 삶을, 우리 국민들을 외면하면 안 되겠지? 이 철책은 의미하는 바가 커. 전쟁의 상흔으로 남겨 다시는 이 세상에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참혹한 전쟁의 유산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거지, 그것을 통해 억압받은 이 나라의 역사는 관광 등의 자원으로 활용도 하고 말이야. 우리 후세에겐 년 수십조의 관광 자원으로 돌려줄 수도 있고 말이야. 우리가 디딘 현실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역사가 지닌 아픔을 딛고 일어서 세계 속으로 빠르게 뻗어나가는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 이것이 4차 5차 산업 아니겠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4월 27일 이후, 그의 표현대로라면 ‘태풍’처럼 우리의 역사는 오늘에 이르렀다.
“막혀있던 물길이라고 보면 쉬워. 2000년 6월15일,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이후의 역사를 물이었다고 생각해 봐. 그 갇혀있던 물에 물꼬가 트이게 되는 것은 4G 5G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선 이미 예견된 순간이었던 걸. 이제 이 시대의 흐름은 태풍처럼 달려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최소한의 합의’라는 것이 있으니까. 5:5의 합의로는 앞으로 달려가질 못해, 믿진 듯, 다소 물러선 듯 보이지만 결국은 이기게 되는 숫자 최소한 6:4의 정치.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지. 기울어져서 가는 세상.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지성, 그게 세상의 미래라고 생각해. 나는. 하하하”

기자가 다시 방문한 농장에서 그는 그의 아내와 이웃들과 벌거벗은 야산에 꽃을 심고 있었다. 흩어져 자라고 있던 민통선 들꽃들의 씨앗을 얻어 두었다가 뿌리고 심고 가꾼다고 했다. 그것이 이듬해 반드시 꽃 필 것이리라는 기대는 이제 가꿔갈 사람들의 노력 여하라고도 했다. 그 ‘기다림의 미학’, 그것이 오늘 그가 이 자리 해마루촌에 머무는 즐거움이라고도 했다.


파주, 이데올로기의 상징처럼 알려지며 ‘위험한 도시’라는 멍에를 쓰고도 끝없이 달라지기 위해 노력해온 곳. 이제 2018년 4월 27일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고 난 뒤 이 나라 미래의 메카처럼 부각되고 있기도 한 곳. 그리고 사람들.
나고 자란 곳이 이 곳이어서 그저 지키고 살아온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산의 슬픔을 안고 고향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라도 살고 싶어 눌러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또 여기 오직 이 나라 역사가 가장 큰 환희로 소리칠 날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이고 싶어 이곳으로 이주한 이가 있다. 김인수 교수.
“파주는 세계인의 도시야, 이데올로기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도시이고. 긴장에서 평화로 가기 위해 끝없이 꿈틀거려 온 살아있는 도시야, 이제 파주는 제 2의 제네바로 다시 태어날 거야. 남북 평화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지. 멋진 일이지?”


4월26일 남북정상회담 전날
그는 이른 저녁을 먹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날 통일로 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저 그러고 싶었으며 그러다 발견한 길 옆 찌그러진 이정표 하나를 치워냈다는 김인수 교수. 그렇게 통일로에서 해마루촌으로 가는 도로 위를 달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여럿의 손길로 이미 잘 관리되었을 길에서 여느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터럭만큼의 흠. 그러나 그 작은 하나마저도 대통령 지나실 길에 놓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마음.
어쩌면 그가 이 곳 해마루촌으로 들어와 살았던 모든 시간의 이유가 이 작은 마음, 오직 이 하나는 아니었을까.
자제들의 이름을 정의, 평화라 지은 이, 농막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이름마저 평돌이, 평순이로 오직 평화를 이야기해 온 그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길, 평돌이와 돌아서 걷는 김인수 교수님 등 뒤로 신록, 노을로 곱게 물들고 있었다.
                                                       




 주성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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