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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27> 호텐토트 비너스(Hottentot Venus)

입력 : 2021-06-21 09:33:05
수정 : 2021-06-21 09:38:22

이해와 오해 127

호텐토트 비너스(Hottentot Venus)

 

저술가 박종일

 

 

세계사의 긴 흐름 가운데서 19세기는 유럽의 통치계층과 지식엘리트가 자신들은 진보의 전방에 서있으며 문명의 표준을 체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점에서 돌출적인 시기였다.

유럽인의 자기문명에 대한 오만한 자부심과 그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할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현대 세계사에서 발생한 셀 수 없이 많은 침략, 폭력, 약탈을 변호하는 기반논리를 형성했다. 유럽인의 이런 관념은 정치적으로는 타민족과 타국가에 대한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로 나타났고, 문화적으로는 인종이 다르면 유전적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능력도 다르며 유럽인은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있으므로 다른 인종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종주의로 나타났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는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로 국제사회에서 표면적으로는 부정되었으나 다른 방식으로 아직도 우리 삶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세라 "사르지에" 바트먼(Sarah "Saartjie" Baartman, 1789~ 18151229)이란 여성이다(이름은 당연히 유럽인이 붙여준 것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19세기 초, 세라 바트먼이 살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세라 바트먼이 속했던 코이코이족은 이때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살아남은 세라 바트먼은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그의 큰 엉덩이와 가슴 등 특이한 외형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된 영국인 윌리엄 던롭(William Dunlop)이 이런 특징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할 목적으로 세라 바트먼을 '구입'한 것이다. 그 후 세라 바트먼은 유럽을 순회하며 인간 전시물이 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던롭은 큰돈을 벌게 된다. 세라 바트먼은 동물 상인에게 팔려 다니는 등 동물로 다루어졌다.

 

당시 유럽인들은 코이코이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수한 유인원' 정도로 생각했고,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명칭인 호텐토트에서 따와 세라 바트먼을 '호텐토트 비너스'라고 불렀다. 세라 바트먼은 광장, 대학 연구소,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자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매춘부가 되었다. 세라 바트먼은 외모와 인종 때문에 가혹한 삶을 살았고 훗날 여성 학대, 식민 통치의 잔혹성, 인종차별의 상징이 된다.

공식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기 때문에 사망 이후에도 그의 유해는 프랑스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바트만의 유해는 뼈와 성기, 뇌 등의 내장이 들어내져 연구 표본이 되거나 박제로 만들어져 1974년까지 파리의 인류박물관(Musée de l'Homme)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바트만의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와 동물 논쟁은 끝을 맺었다.

이후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 반환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세라 바트먼의 박제에 대해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관련 법규를 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의 반환을 거부하였다.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어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다. 결국 20025월 프랑스 정부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세라 바트먼의 유해를 모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 케이프 주로 돌려보냈다. 태어난 지 200년이 넘어서 박제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매장하는 의식에는 타보 음베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임 대통령을 비롯하여 8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1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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