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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장릉,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입력 : 2016-06-30 14:02:00
수정 : 0000-00-00 00:00:00

파주장릉,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파주를 사는 즐거움이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제2자유로가 끝나는 갈현리에 위치한 파주장릉(사적 제203호)이 올 해 6월 17일에 개방된 것이다. 꾸준한 개방요구가 있었으나 문화재청은 장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정비를 새롭게 하고 개방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는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위치한 파주삼릉(공릉, 순릉, 영릉)과 더불어서 파주시민들에게는 공릉천변에 자리한 이 왕릉들이 문화공간이자 가족들의 휴식처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곳을 클릭하시면 ‘파주에서’ 43호 7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장릉”을 참조 하실 수 있습니다.)

 

▲장릉으로 올라가는 탐방로

 

▲재실, 능지기가 기거하던 시설

 

장릉은 비록 1시간 정도면 충분히 탐방할 정도의 아담한 왕릉이다. 그러나 입구로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비된 탐방로 아름드리 나무그늘의 게시판을 따라가면 장릉에 대한 자세한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군락지를 따라가다보면 오른쪽에 능참봉이 기거했던 아담한 재실이 나타난다. 왼쪽의 탐방로를 따라가면 장릉이 나타나는데 조선왕릉의 특징으로 보이는 겸손한 규모의 왕의 무덤이 나타난다..

 

장릉은 전국에 세 곳이 존재하는데 각각 다른 한자를 사용하여 구분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은 단종의 무덤이며,  파주장릉(長陵)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1595 ~ 1649)와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김포의 장릉(章陵)은 반정에 성공한 인조의 아버지 추존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5년)을 겪고 1649년에 세상을 떠난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다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돌아온다. 중국은 권력의 중심이 청나라로 넘어가고 있건만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와의 우의를 중시하고 있었고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독살을 당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버지 인조 역시 명나라와의 우의를 중시하던 차에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인조는 외세와의 관계를 잘 풀지 못했고, 가정에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탐방로 입구에는 게시판에서 장릉을 공부를 하는 시민들

 

▲수 백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군락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 ‘한양길라잡이’ 회원들

 

▲탄현면 삼성초등학교 22회 졸업생 정영희(좌), 김정숙씨.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에 따라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장릉이 개방이 된지 3주일이 되었다. 평일에는 약 90여명, 주말에는 300여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아직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는지 방문객들은 인근의 주민들 보다는 오히려 역사를 공부하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 홍보가 이루어진다면 파주시민들이 애용하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 중에서도 용케 알고 찾아 온 파주시민을 만났다. 탄현면 삼성초등학교 22회 졸업생이라는 정영희씨와 김정숙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장릉으로 소풍을 왔었다며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어릴적 친구들 생각이 절로 난다며 ‘파주에서’를 통해서 친구들에게도 이 소식이 알려지기를 희망했다.

 

장릉은 6월 ~ 8월까지는 6시 30분까지 개장을 하며, 9월 ~10월은 오후 6시, 동절기는 5시 30분까지 개방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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