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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한의사의 ‘컬럼보다 수다’ - 죽음 앞의 인간

입력 : 2014-11-20 16:16:00
수정 : 0000-00-00 00:00:00


 



죽음 앞의 인간

먹고사는 것의 의미는 조난당한 선원의 수영복처럼



래소한의원 권해진 원장





 



 







노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철봉에 매달렸다. 오래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 아니냐고? 시작은 그랬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반세기를 견뎌낸 습관이 노인의 몸을 밀고 나갔다. 언제부턴가 사는 것도 습관처럼 여겨졌다. 먹고, 자고, 걷고, 먹고, 걷고, 또 걷고. 어떤 날은 사는 이유를 생각해 냈다. 다음 날엔 또 잊어버렸다. 이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먹는 것의, 사는 것의 의미는 조난당한 선원의 수영복처럼 부질없었다.





 





 



죽음 앞의 인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김기창의 소설 「모나코」의 일부이다.



노인은 부유하지만 습관적인 삶에 무료해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앞에 미혼모가 등장한다. 노인은 자신의 욕망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제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미혼모의 등장으로 젊은 여자와의 사랑을 꿈꾸다가 죽어가는 노인 이야기라고 흔한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저간에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한 사람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깔려 있다. 미혼모는 그저 놓았던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잡는 계기였을 뿐이다. 그전까지는 음식이 그 대상이었으리라.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노인이 낯설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자주 노인들을 보아서일까.



 



노인의 계절



올 때마다 아픈 부위를 상세히 설명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매번 같은 이야기라 외울 정도가 되었지만 나는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는 나을 거라는 희망의 눈빛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병원에 오는 것이 삶의 의지의 한 표현이었다.



허리가 몹시 아픈 상태로 수개월을 넘긴 할아버지가 있었다. 허리에는 복대가 항시 채워져 있었다. 그동안 왜 치료를 받지 않으셨느냐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늙으면 다 아픈 거지. 치료받기가 귀찮아서 말이야.”



그에게는 병원의 치료가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두 분은 부부였다. 그러나 삶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다.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집착에 가까운 할머니의 태도, 달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포기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태도.



정답은 없다. 죽음 앞에서는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삶의 과정이라 여기고 나이 듦과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한의학에서는 자연을 생장화수장(生長化收藏)이라고 표현한다. 태어나고(生) 자라고(長) 변화하며(化) 또 수렴(收)되고 감추어지는(藏) 것을 의미한다. 자연이 생장화수장의 과정을 거치듯 인간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노인은 ‘藏(숨길 장)의 계절’ 즉 겨울이다. 누구에게나 겨울은 춥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죽음 또한 삶이 지나가는 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2주 동안 할머니가 병원에 오시지 않았다. 소식을 통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위의 소설이 떠올랐다. 소설 속 노인은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를 외국여행 보낸 뒤 거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노인의 시체는 두 달 후 발견되었다. 소설은 그랬지만 우리 병원에 오시던 할머니 옆에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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