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② 북쪽으로 간 정약용(上)

입력 : 2015-05-14 11:49:00
수정 : 0000-00-00 00:00:00

마전향교에서 벌어진 일

 

백학장터 골목 | 38선에 맞춰서 3일, 8일 장이 선다.

 

북쪽으로 가는데...

다산 정약용의 행적은 출생지인 남양주, 유배지인 강진, 정조와 함께한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정작 다산의 열정과 기개를 맘껏 드높인 절정의 발자취를 남긴 장소는 이곳이 아니다. 다산연구의 권위자 박석무는 평전을 지으며 맨 앞에 암행어사 시절을 놓았다. 암행어사 명을 받은 다산은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을 기찰한 뒤 파주와 고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다.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은 모두 임진강을 연한 고을이다. 다산의 암행길은 임진강을 따라간 셈이다. 암행에서 돌아온 다산은 상소를 통해 전 연천현감 김양직과 삭녕군수 강명길을 파직시킨다. 이들이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이 흙을 실어 나르는 배가 모자랄 정도로 넘쳤다고 한다. 임금의 총애를 믿고 저지른 짓이었다. 김양직은 사도세자 능자리를 정한 지관이었고, 강명길은 어의였다. 다산은 또 한 사람, 당시 경기관찰사이던 서용보도 비리를 고발한다. 이 일은 다산 평생을 두고 악연으로 따라붙는다.

 

마전향교터 정약용은 탐욕스런 자들이 훼손하려던 향교를 지켰지만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서용보의 집안사람 중에 마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전향교가 땅이 좋지 못하다고 속여 명륜당을 헐어서는 서용보에게 바치려 했다. 다산이 알고 이를 징치한다. 서용보가 직접 연루된 일도 있었다. 관찰사 서용보는 임금이 화성에 행차하는 길을 닦는다며 임진강에 접한 고을에서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다. “괴롭다. 화성이여 과천에 길이 있는데 왜 금천으로 길을 닦는가.” 백성들은 화성을 원망했다.

 

임금은 화성을 건설하며 부역을 쓰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민폐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이런 판에 말단에서는 이를 원망하게 하는 비리가 저질러진 것이다. 개혁정책은 이렇게 빛을 잃어가는 것이다. 다산의 탄핵으로 서용보는 평안도 용천으로 쫓겨난다. 누구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 들어온다는 뜻일까? 서용보는 정조 사후 승승장구해서 정승의 지위에 오른다. 최고위직에 오른 서용보는 다산의 앞길을 철저히 막아버린다. 일은 이렇게도 흘러가는 것이다.

 

마전리 서종섭묘 | 서용보가 묘비를 새겼다. 정약용의 굴곡진 삶이 여기서 시작됐다.

 

1801년 신유옥사가 일어났다. 다산은 한때 서학을 공부했지만 천주교와 무관함이 여러 사람에 의해 증명됐지만 단 한 사람 서용보가 끝까지 처벌을 요구한다. 이로써 길고 긴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2년 뒤 조정은 다산의 석방을 결정했지만 다시 서용보가 저지한다. 다산은 18년만에야 유배에서 돌아온다. 향리로 돌아온 뒤 조정은 다산의 등용을 논의한다. 이 역시 서용보가 막아버린다. 뼈에 사무친 원한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긴 유배생활은 오늘의 다산을 낳았고, 다시 정치에 나아가지 못하면서 다산은 평온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산의 불행은 시대의 빛으로 피어났고, 시대의 빛이 실현되는 기회가 사라진 순간 다산은 오히려 평화를 얻었다. 일은 이렇게도 흘러가는 것이다.

 

다산이 임진강에서 보여준 것은 젊은 기개와 정의감만은 아니었다. 정의로움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한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른 목은 여위어 따오기 모양이요/ 병든 육신 주름져 닭살 같구나/ 우물물 있다마는 새벽물 긷지 않고/ 땔감 있다마는 저녁밥 짓지 못해/ 사지는 아직도 움직일 수 있건만/ 굶은 다리 제대로 걸을 수 없네/ 해 저문 넓은 들에 부는 바람 서글픈데/ 애처로운 저 기러기 어디로 날아가나 [굶주린 백성의 노래 중에서]

 

애민시가 탄생한 것이다. 지식인이 쓴 민중시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후로 다산의 시세계는 자연을 관조하던 것에서 민중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폐교된 마전초등학교 | 변방 시골의 팍팍한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는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푸른 산은 겹겹으로 돌벽을 임했고, 백조는 쌍으로 모래에 내린다. 동산에 가득한 토란 · 밤 맛이 멋지고, 곳마다 풍경은 볼만도 하다. 어찌하면 이 지역에서 한가히 놀까." 조선시대 권우란 사람이 쓴 적성 임진강 시다. 누군가는 모래밭에 내리는 백조를 한가로이 바라볼 때, 비쩍 말라 따오기 목을 한 백성들은 애처롭게 기러기를 바라본다. 같은 임진강이 보는 이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어디에서 살까를 생각한다면 다산의 임진강보다 권우의 임진강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임진강에서 누구와 이웃으로 살까를 묻는다면 아마도 다산이라 답할 것이다.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백 년 전 백성들은 이 거리에 모여든 뒤 독립만세를 부르며 마전향교까지 행진했다.

 

다산이 민중의 참상을 읊은 백년 뒤 마전향교에선 백성들 소리가 울려나왔다. 다산이 대변한 목소리가 아니라 스스로 외친 소리였다. 1919년 3월21일. 마전향교에 모인 수백의 사람들은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석장리 사람 조우식과 정현수 등은 두일 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뒤 모인 사람 2백여 명을 이끌고 향교로 왔다. 통구리 사람 백천기도 사람들을 이끌고 와 향교마당을 가득 채웠다. 밤새도록 마당은 만세소리로 가득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외쳤지만 다시 세워질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조선이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이날로 목숨이 끊어졌다. 고종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버림받은 백성들이 역사의 주인이 됨으로써 왕조는 끝나 버렸다. 이제 세워질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재석(DMZ 생태평화학교장)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