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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② 북쪽으로 간 정약용(下)

입력 : 2015-05-29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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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심은 다산을 기다리지 않았다

 

민중은 역사의 주인으로 당당히 등장했지만 시대는 여전히 민중의 대변자를 기다린다. 민중을 얻지 못한 선각자는 외롭고 지도자를 얻지 못한 민중은 지리멸렬한다. 이 어쩔 수 없는 간격을 메우려 고심하는 것이 역사인지 모른다. 역사는 발전한다지만 역사적 진보는 시간을 따라 순차적으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문득문득 돌출하는 것이다.

 

이계심 사건을 처리한 다산의 면모는 시대의 한계 운운하는 따위의 변명을 무색하게 한다. 천주교와 연루됐다는 공격이 심화되면서 다산은 중앙정치를 떠나 지방관으로 물러나게 된다.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며 첫 길에 마주한 임무가 이계심 사건이다. 이계심은 지방민 1천명을 몰고 와 관의 폐단을 고발하는 집단시위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조정으로부터 강력히 처벌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건이었지만 다산은 이계심을 무죄 석방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하는 너 같은 사람은 천 냥을 주어서라도 사야할 사람이다." 무죄 석방의 이유다. 놀랍지 않은가. 집회 시위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다는 이유로 처벌 받는다. 그저 무죄인 것이 아니라 천금을 주어도 못 살 사람이라니! 지금에서 봐도 다산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다. 민중은 미래의 지도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계심은 행동했고 여기에 우연히 다산이 나타났다.

 

‘걸어서 북쪽으로 가는데..."

 

다산의 북쪽 행로를 조금 더 살펴보자. 암행어사 임무를 맡고 적성에 도착한 다산은 서까래만 앙상한 시냇가 찌그러진 집을 발견한다. 백성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여기서 마전으로 가서 향교사건을 처리한다. 임진강 당개나루를 건넜을 것이다. 다시 임진강을 건너 연천으로 간다. 연천은 다산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고을이다.

 

"푸른 산속 조그만 연천고을에/ 재차 유람하노라 때는 초겨울/ 누각에 새로 바꾼 기둥을 보고/ 정원에 전에 심은 솔을 만진다" 다산의 ‘연천현 누각에서"란 시다. 재차 유람한다고 한다. 정원에는 소나무도 심었다고 한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정재원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다산은 수년을 이곳에서 보낸다. 유복한 사또 자제로 생활한 것이다.

 

연천을 거쳐 삭녕으로 향한 다산은 우화정을 찾는다. 허목의 우화정기를 본 뒤 자나 깨나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일부러 짬을 내 들른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곡산부사로 부임하며 황해도 일대를 두루 밟고 다닌다. 임진강이 시작하는 노인령도 찾는다. 다산은 방대한 저작 중 하나로 지리서인 대동수경을 남겼다. 우리나라 북부 여섯 강이 수록돼 있다. 그중 마지막 편이 대수, 임진강이다. "대수는 안변부의 노인령에서 발원한다." 대동수경 임진강편 첫 문장이다.

 

이 길을 지금 따라가 보면 어떨까? 적성촌 관아는 사라졌지만 농촌의 ‘찌그러진 집"은 지금도 있다. 다산의 일생을 꼬이게 만들고 한때는 민중들의 함성이 밤을 밝혔던 마전향교는 헐리고 없다. 사또 자제로 살았던 연천관아는 터만 알려져 있다. 우화정은 없지만 강을 굽어보던 대는 남아 있을 것이다. 임진강을 따라 올라가면 대수가 발원한다는 노인령에도 이른다. 여기서 평양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아호비령 너머가 곡산이다. 이 길에서는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던 한강의 여유당도 아니고, 완숙의 경지에 이른 강진의 다산과도 다른, 패기 넘치는 젊은 개혁정치가 정약용을 만날 수 있다. 걸어서 북쪽으로 간다면 말이다.

 

 

이재석(DMZ 생태평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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