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㉖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임진나루 (2)
수정 : 0000-00-00 00:00:00
강물은 시가 되고 절벽은 그림이 되고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임진나루 (2)
‘파주’ 하면 ‘분단’, 북한’, ‘DMZ’ 등 남북한의 갈등이 떠오른다. 특히, 철문으로 가려진 임진나루 앞에 서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임진강을 바라볼 때면 ‘아름답다’, ‘좋다’라는 느낌보다 ‘한스럽다’ ‘슬프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임진나루 양쪽으로 이어진 적벽과 산들은 유유히 흘러내려온 임진강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임진나루의 풍경을 살펴보자.
선비들이 임진나루에서 시를 짓다
전통 시대 많은 선비들이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시를 지었다. 고려 말의 문신 변계량은 어느 가을날 저녁 임진나루를 건너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임진나루[臨津渡]
갈대꽃 단풍잎이 저문 강가에 지고 / 작은 나룻배 두어 척 강을 건너네.
모래밭의 흰 갈매기 누구와 친해 보려고 / 해마다 오가는 사람 마음 설레게 하나.
-변인숙, 『파주예찬』 1권, 95쪽-
이밖에도 이규보, 강희맹, 윤선도, 정약용 등 이름 있는 선비들이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풍경을 묘사하였고,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노래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정선이 임진적벽을 그리다
임진나루와 관련하여 시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정선의 <임진적벽>과 김양기의 <임진서문>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정선(1676~1759)은 많이 알고 있듯이 호가 겸재이고 진경산수화라는 화풍을 개척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명승고적을 직접 답사하면서 본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진경산수화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묘사하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과 풍류를 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폭에서 강조되는 사물이 과장되게 표현되기도 한다. 아무튼 정선이 어느 때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그것을 화폭에 담은 것이 <임진적벽>이다. 동파에서 임진나루를 보면서 왼쪽으로 이어진 적벽을 강조하여 하늘 높이 치솟게 표현하였다. 마치 드론을 띄워서 공중에서 촬영한 듯한 모습이다. 전형적인 진경산수화풍이다. 그림에는 영조 31년(1755)에 쌓은 성문이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1755년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김양기가 임진서문을 그리다
김양기는 단원 김홍도의 아들로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김홍도(1745~?)가 18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므로, 김양기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김양기도 정선과 마찬가지로 어느 때인지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한 폭의 그림을 남기게 되는데 바로 <임진서문>이다. 구도는 정선의 <임진적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파에서 임진나루를 보면서 표현하였으나 겸재 정선보다 낮은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양기의 그림에는 임진나루의 성문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영조 31년(1755) 임진나루에 성을 쌓고 성문의 이름을 ‘임벽루 진서문’이라고 했으므로, 김양기의 <임진서문>은 1755년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나루의 상시 개방을 바라다
나루의 본래 기능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을 닫아걸고 길을 막으니 오히려 강을 막는 곳, 이곳과 저곳을 차단한 곳이 되어 버렸다. 임진나루는 임진강을 건너게 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임진나루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잘 이용하면 남한과 북한을 이어주는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전통 시대 시인 묵객들이 임진나루의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노래하고 화폭에 담아냈듯이, 파주시민과 우리나라 국민들이 만끽할 수 있게 상시 개방할 필요가 있다. 임진나루는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일정 기간 개방이 된 곳이다. 오늘날 개방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70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