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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3) 10. 임진강에 산 사람, 미수 허목 (4) 다른 길, 끊일 듯 이어지는 발걸음

입력 : 2021-12-21 06:07:22
수정 : 0000-00-00 00:0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3) 

10. 임진강에 산 사람, 미수 허목

 

(4) 다른 길, 끊일 듯 이어지는 발걸음

 

아침 해가 동쪽 산마루 위로 떠오르니/ 창 앞에 산안개 피어오르네./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하고/ 갈필에 먹 묻혀 과두문자 쓰노라.(산 밖의 일은 알지 못하네. 허목)”

 

▲ 연천 강서리 허목 묘

 

2차예송 이후 조정에 나갔던 남인들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큰 타격을 입는다. 허목은 파직됐고 생을 마칠 때까지 연천 집에 머문다. 극형은 모면했지만 그는 글씨 쓰기를 금지당할 만큼 궁지에 몰린다. 과두문자를 닮은 허목의 전서는 그만의 독특함을 표현한 글씨체였다. 이것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문화행위로 지목된 것이다. 일종의 문화예술 탄압인 셈인데 허목은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글씨를 버리지 못한다. 88세로 세상을 뜨기 며칠 전 그는 봉화의 제자 권두인에게 청암수석현판 글씨를 전서로 써 보낸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후 허목을 사사한 성호 이익은 허목의 서첩에 발문을 붙이며 이때 일을 거론한다.

미수선생은 매사에 옛것을 좋아하여 사소한 편지나 만필이라도 과두문자의 획으로 예서를 썼다. 벌레 주둥이, 새 발톱 모양의 글씨가 완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참으로 기이하다.”

그리고 다른 이의 입을 빌어 허목의 고상한 면모를 드러낸다.

임금을 섬길 때는 반드시 경전에서 의리를 끌어내어 요순의 도가 아니면 진언하지 않았으며, 물러나 집에서 지낼 때는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한 가지 선을 행하는 정도로 이름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생의 본모습이다.”

이익은 발문 뒤에 세태와 상관없이 과두문자를 쓰겠다는 위의 시를 붙여둔다.

 

▲ 허목의 절필로 알려진 봉화 청암정의 청암수석 현판 

 

이 시는 한 세대 뒤 정약용에 의해 다시 인용된다.

약용은 근래에 주대소를 본받아 새벽에 일어나면 맨머리로 쾌각의 위에 앉아 5색의 붓으로 고서 몇 장씩을 평하고, 이어서 허 미수가 칡 붓으로 과두체를 쓰느라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했던 것을 사모했습니다.(정약용. 채이숙에게 답한 편지 중에서)”

고서를 평하고, 과두체를 쓰겠다는 말은 허목을 따라 살겠다는 의미다. 정약용이 한창 벼슬하던 삼십대 중반의 일이다. 허목의 고문체에 대한 이익과 정약용의 평가는 이들 사이의 강한 연대감을 보여준다.

허목의 고문과 고경 탐구는 주자학을 통하지 않고 유학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오로지 주자에 업혀 기득권을 지키려는 주류집단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이상사회인 요순시대를 지금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이익도 정약용도 그 방향에서 같았다. 이익이 태어난 다음 해에 허목은 생을 마쳤다. 정약용이 태어난 다음해에 이익이 세상을 떴으니 이들이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이익은 가학을 통해 사후의 허목을 접했다. 정약용은 15세 나이에 이익의 저작을 대하고 그를 좇아 학문하기로 결심한다.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허목,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소위 근기남인 학맥이 이로써 세워진다. 허목으로부터 정약용까지, 이들이 살아간 연대를 합하면 240년에 이른다. 긴 세월 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고단한 자리를 지켰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이 흐름은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조선이 다할 때까지 이어졌다.

 

▲ 은거당 터에 세워진 기념비 

 

내가 두 번이나 은거당을 찾아가서 선생(미수 허목)의 유상에 배알을 한 일이 있으나, 다만 웅연을 찾아 구경하지 못한 것이 늘 묵은 빚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금년 겨울에 비로소 이 곳을 방문하였다. () 그리고 유지호 어른이 연천의 군수로 나왔을 때 만든 웅연범주첩을 구경하였다.(이남규. 웅연 놀이에 대한 간단한 기록중에서)”

은거당을 찾아 기록을 남긴 이남규는 조선말기 일제의 침략에 맞서다 순국한 선비다. 그는 허목의 은거당을 들렀다가 웅연을 찾는다. 글을 보면 앞서 비슷한 방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남규, 유지호 등은 허목에 학문의 연원을 두었고, 모두 일제의 침략에 맞선 인물이다. 이들의 지사적 면모는 재야성을 지닌 당파의 내력을 보여준다. 후학들은 허목의 자취를 찾아서 임진강으로 왔다. 그런 발걸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저자

 
#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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