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41) 경계에서 찾은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2) 젊은 정약용이 걸어간 길

입력 : 2022-07-13 02:12:46
수정 : 2022-07-13 02:4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41) 

경계에서 찾은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2) 젊은 정약용이 걸어간 길

 

암행어사 정약용이 헌 뚝배기같은 적성촌을 거쳐 마전에 이르렀을 때다. 당시 경기관찰사 서용보 집안사람 중에 마전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전향교가 땅이 좋지 못하다고 속여 그 땅을 서용보에게 바치려 했다. 고을 유자들을 위협해 향교를 옮기려 했는데 이미 명륜당은 뜯어버린 뒤였다. 정약용은 일을 중지시키고 주모자를 잡아 처벌한다.

관찰사 서용보는 또 금천의 도로를 닦는 일에 쓴다며 임진강 주변 고을에서 많은 비용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이 있는 화성에 자주 거동하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백성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괴롭다, 화성이여! 과천에도 길이 있는데 어찌하여 금천으로 길을 닦는고.”

 

 

백성들은 길이 있는데도 새로 길을 만든다며 조세를 거둬들이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돈을 거둬들인 것은 관찰사지만 원망은 화성 사업을 벌인 왕을 향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민폐를 피하기 위해 부역을 쓰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런데 말단에서는 이를 원망하게 만드는 일이 저질러진 것이다. 정약용은 이를 왕에게 상주한다. 암행어사로서 당연한 임무였지만 이 사건은 정약용이 길고 긴 유배에 처해지는 결정적 빌미가 된다. 나중에 정승의 자리에 오른 서용보는 원한에 사무친 듯 정약용의 앞길을 철저히 막아버린다.

신유년(1801)의 옥사. 대신들이 정약용의 무죄를 말했지만 오직 서용보만이 죄 줄 것을 고집한다. 이로써 정약용의 유배가 시작된다. 계해년(1803) 겨울에 태비가 석방을 명했지만 상신 서용보가 다시 저지한다. 유배는 길어져서 18년 만에야 향리로 돌아온다. 조정은 이때 정약용을 기용하려 했지만 이 역시 서용보가 막아선다.

긴 유배생활이 오늘의 다산을 낳았고, 정치에 나아가지 않음으로 말년이 평화로웠던 것은 알 수 없는 인생의 곡절이다. 어두운 시대는 고매한 다산을 낳았고, 그는 불행을 딛고 시대의 빛으로 피어났다. 곡절 많은 인생의 씨앗이 임진강 연안 고을을 감찰하던 정약용의 발걸음에서 뿌려졌다.

 

푸른 산속 조그만 연천고을에/ 재차 유람하노라 때는 초겨울/ 누각에 새로 바꾼 기둥을 보고/ 정원에 전에 심은 솔을 만진다.(정약용. 연천고을 누각에서부분)”

 

암행어사로 은밀하게 찾아온 연천은 정약용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고을이다. 시를 보면 연천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뀐 기둥을 보고, 전에 심었던 소나무도 만진다. 정약용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는 연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수년을 연천에 살았다. 유년을 보낸 추억의 장소였던 것이다.

 

용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는 빗과 세수 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들 용을 밉살스럽게 여겼다.(정약용. 맏형수 공인이씨 묘지명중에서)”

 

어머니의 죽음, 형수와 일화 등 가정사의 특별한 장면이 연천을 배경으로 술회된다. 어린 정약용은 삼부첩을 베껴두어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기도 한다. 삼부첩은 삼부연폭포를 유람한 미수 허목의 시문집이다. 허목은 기호남인의 영수로서 세대를 넘어 성호 이익으로, 다시 정약용으로 학맥이 이어지는 인물이다. 허목의 생가가 연천에 있었고 정약용은 그 집안사람에게 책을 얻어 베껴둔다.

 

나는 일찍이 미수 허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는 우화정의 시내와 산, 물과 바위의 뛰어난 경치를 적은 기가 있었다. 나는 자나 깨나 그곳에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갑인년(1794) 초겨울에 왕명을 받들어 암행어사가 되어 나갈 때였다. 연천에서부터 걸어서 북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깎아지른 절벽이 눈에 띄었다. 그 절벽 꼭대기에는 날아오를 듯한 정자가 서 있었다. 풀과 바위를 더위잡고 올라가서 정자의 앞면을 바라보니, 바로 우화정이었다. , 이것이 우화정이다.(정약용. 우화정기일부)”

다들 정약용의 유배와 말년의 저작에 주목한다. 하지만 감수성 넘치는 어린 시절과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은 그의 인생행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곳에선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던 한강의 여유당도 아니고, 완숙의 경지에 이른 강진의 다산과도 다른, 시대에 맞선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가 정약용을 만날 수 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42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