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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오해[134] -모택동의 자식들

입력 : 2022-03-14 02:58:18
수정 : 2022-03-15 23:44:04

모택동의 자식들

박종일

 

 

금년 초(18)에 중국의 주요 신문들이 유사제(劉思齊) 동지가 어제 새벽에 향년 92세로 북경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그녀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毛岸英, )의 아내였다. 유사제(1930년 출생)의 아버지 유겸초(劉謙初)는 공산당원으로서 지하활동을 하다 체포 처형되었고 어머니 장문추(張文秋)는 모택동의 동지였다. 1927년 무한에서 열린 공산당 제5차 대표대회에서 장문추를 만난 모택동은 그녀에게 장래에 네가 딸을 낳으면 내 아들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936년 연안(延安)에서 혁명선전극을 관람하던 모택동은 극중 아역 주인공인 유사제가 장문추의 딸이며 장문추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유사제를 양녀로 거두었다. 유사제와 모안영은 모택동의 권유로 만나게 되고 194910월에 결혼하게 된다.

모택동에게는 아버지가 정해주어 조혼한 첫 부인이 있었으나 두 사람은 평생 교류한 적이 없다.

두 번째 부인 양개혜(楊開慧)는 모택동의 고등학교(호남제1사범학교) 교장 선생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혁명동지로 발전한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안영(1922년 출생), 안청(安靑, 1923년 출생), 안신(安信)이 태어났다. 모택동이 유격활동을 위해 정강산으로 들어가자 양개혜는 아이들을 데리고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다가 국민당에 체포된다. 전향과 모택동과의 결별을 거부한 그녀는 처형되고 아이들은 거리에 버려졌다.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다가 안신은 실종되고 안영, 안청은 외할머니가 거둔다. 그 후 두 아이는 공산당의 비밀루트를 통해 연안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모스크바로 보내져 공부하게 되고 1946년에 연안으로 돌아온다.

 

 

모택동의 세 번째 부인은 하자진(賀子珍)이다. 그녀는 정강산 유격활동 시절부터 장정을 거쳐 연안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의 세월을 모택동과 함께하면서 33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안홍(安紅, 1932년 출생)과 이민(李敏, 1936년 연안에서 출생)만 살아남았다. 안홍도 장정 시기에 키울 형편이 되지 못해 모택동의 동생 택담(澤覃)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택담도 공산당원으로서 지하활동 중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 후 안홍도 실종된다.

연안에서 모택동은 하자진과 이혼하고 강청(江淸)과 결혼한다. 두 사람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나 강청에게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눌(李訥, 1940년 출생)이란 딸이 있었다. 모택동은 이눌을 친자식처럼 가르치고 사랑했다. 하자진은 이혼 후 딸 이민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가 공부하다가 1948년에 귀국한다. 그녀는 평생 모택동을 그리워했으나 혁명원로로서 독자적인 생활을 꾸려나갔다.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은 중공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다. 참전한지 한 달 만인 195011월에 그는 미군의 폭격을 만나 28살의 나이로 전사한다. 그의 아내 유사제는 안영이 출장 간 줄로 알고 있었고, 그의 죽음은 3년 동안이나 아내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다. 그는 평안남도 회창(檜倉)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혀 있다. 유사제는 모택동이 주선하여 공군장교 양무지(楊茂之)와 재혼하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모안영을 기리는 뜻으로 소영(小英)이라 지었다. 유사제는 2006년에 처음으로 모안영의 묘소를 찾았다.

모안청은 평생 동안 러시아어 통번역가로 당과 국가기관에서 일했다. 그의 아내 소화(邵華)는 유사제와는 아버지가 다른 자매지간이었다. 모택동은 장문추와 겹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모택동과 하자진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민은 모택동의 친딸이면서 성이 이()씨이다. 모택동은 그녀에게 나의 딸로서 평범하게 살기는 어려우니 성을 바꾸어 살아가라고 권했다.

모택동의 자식들 가운데 아버지의 후광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린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1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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