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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책만세 <1> 갈매기야, 나와 노닐자 : 헤이리길 - 성동사거리에서 반구정까지 21킬로미터

입력 : 2022-01-05 02:53:21
수정 : 2022-01-13 03:57:04

<편집자주>
'내책만세'는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세상이란 뜻으로, 파주 교하도서관 독서동아리입니다. 일년에 책 한 권 만들기를 목표로 매일 일상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각자 책 한 권씩을 엮어서 독립출판물을 냈습니다.

이 책들에서 한 편씩 뽑아 <파주에서>에 연재합니다. (문의 시옷살롱 031-955-6202)

 

내책만세 <1>

갈매기야, 나와 노닐자

   : 헤이리길 - 성동사거리에서 반구정까지 21킬로미터

 

김연숙: 60년 서울생, 파주 운정에서 7년차. 걸으면서 자유를 꿈꾼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류점 성동리 오두산전망대 아래서 강들은 만나 김포를 거쳐 강화로 빠져나간다. 두물머리는 김포, 파주와 북한 땅에 맞닿았는데 이곳이 교하다. 조선 광해군 4, 지리학을 공부하는 이의신이 상소를 올려 천도를 청했다. 이유인즉 임진왜란, 역적들의 변란, 신하들은 당을 갈라 싸우고, 산들이 벌겋게 벗겨진 것은 한양의 지기가 쇠패해진 까닭이라는 것이다. 광해군은 마음이 기울었으나 신하들은 천도불가론을 주장하며 이의신을 벌주자 했다. 교하천도론은 요망한 지관의 헛소리로 끝이 났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한 최창조 교수가 통일 대한민국의 수도로 교하를 언급했다. 통일 후 30~50년 쯤 서울과 평양의 중간인 개성에 임시 통일수도를 두고, 그 사이 교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앞으로 500년 국가 장래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펼쳤다. 교하가 국토의 중앙이며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최적의 항만입지요 관후박대한 땅의 품성을 품었다는 것이다.

 

교하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성동리에서 출발도장을 찍고 프로방스 가는 언덕길을 오른다. 운정으로 들어오기 전 살았던 일산의 호수공원에 나무도 없이 호수만 덩그러니 있던 시절, 이국풍의 프로방스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주부들이나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유럽풍의 빈티지 스타일에 발코니와 가게 안을 장식한 꽃들은 어쩌면 가보지 못할 프로방스에 대한 로망이랄까, 새파란 하늘에서 내리꽂는 햇살과 바람이 꽃들에게 생기를 주는 지중해 마을여행을 꿈꿔보기 충분했다. 그러다 프로방스가 비약적 발전을 하며 주변에 땅을 넓히더니 관광단지가 되면서 발길을 멈췄었는데, 지중해 마을여행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해졌고 로망은 추억이 되고 말았다.

 

언덕을 넘어서니 마을은 금세 조용해졌다. 농촌마을 대동리는 모낼 준비를 하느라 논에 물을 잔뜩 담아놓고 모판도 마련했다. 자유로를 따라가는 아랫길에서, 들판을 곁에 두고 자전거와 길을 같이 쓰자니 오고가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잠시 피해주어야 한다. 나는 달팽이, 그들은 휙휙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내가 멈추는 게 맞다. 올 들어 황사가 가장 심하다는 날답게 모래바람이 성가시다. 코로나 때문에 쓰기 시작한 마스크가 황사를 막아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임진강과 처음 만나는 만우천을 건넌다. 사람 없는 조용한 천변, ! 이런 곳이 있었네. 적당히 자란 풀들 너머로 밀물에 배 불린 만우천과 그 너머 만우리를 둘러본다. 이렇게 걷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마을 이름들이 가끔 자동차로 자유로를 달릴 때면 입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상대방은 관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기억창고와 말이 나가는 입의 현란한 케미를 막을 수가 없다. 아마도 내가 걸어간 길에 대한 애정이 과한듯하다.

 

오금리 마을 입구에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킥보드를 가지고 서있다. 사람을 못 보니 아이라도 반갑다. 또래 친구들이 있을 만한 마을이 아닌데 왜 나와 있을까 물으니 친척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늙은 향나무가 저보다는 조금 덜 오래된 돌담 위에서 한쪽으로 마냥 기울어져 터널을 만들어 놓은 곳, 마을에서 보면 동구 밖이다. 그곳에서 언제 올지 모를 피붙이를 기다리던 아이와 주고받은 몇 마디가 오늘 길에서 한 이야기의 전부가 될 줄이야. 사람이 그리운 길이다.

 

문지리와 낙하리를 자전거 길과 산길로 번갈아 지나고, 내포리에 들어서면 내륙을 돌며 모아 온 것을 임진강에 쏟아 부은 듯 드넓은 문산천 하류와 조우한다. 한여름 연천길을 걷기 위해 새벽에 나섰을 때 막힌 것없는 하늘에서 일출을 온전히 바라본 곳, 소나기가 한차례 훑고 간 저녁에는 석양을 검붉게 칠해 놓아 가슴이 미어지게 아름다웠던 곳이다.

 

문산이 도시화되면서 문어발처럼 아파트들이 외곽으로 뻗어나가더니 바로 그곳, 문산천 위에 서울-문산간 고속도로 진출입로가 생기고 거대한 고가 구조물이 뒤를 이었다. 문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할 임월교는 한창 공사 중, 인도가 따로 없어 자동차에게 미안해야 할 정도다.

 

당동리를 넘어 반구정이 있는 사목리로 가는 길은 반구정 때문에 몇 번 왔던 길이니 여유 있게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평화누리길은 숲에다 길을 냈다. 예고 없이 만난 산길, 그 안에 즐비한 무덤들, 산 속의 고요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하다.

 


 

내 다리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 내달린다. 이 길을 벗어나야 한다. 숲의 고요를 깨우고 내 몸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빠샤"를 외쳤다. 내 세례명 빠트리시아를 줄여 부르는 나를 위한 응원구호다. 30분 넘게 산길을 달리다 사목리 도로에 내려서니 인간계가 포근하구나. 반구정 앞에서 스탬프에 도장을 찍는다.

 

 

방촌 황희의 반구정

 

반구정은 방촌 황희 선생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임진강 위를 노니는 갈매기를 벗 삼아 소요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반구정과 앙지대가 임진강가 언덕 위에서 나란히 강을 내려다보고 있고 영정각, 재실, 동상이 삼문 너머에, 입구에는 기념관이 있다. 전란에 해를 입고 재건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른다.

 

먼데서 벗들이 나를 찾아오면 자주 반구정에 데리고 간다. 나무에 초록 물이 오르면 정자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는다. 운이 좋은 날은 우리도 갈매기와 벗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 늘 조용하다. 누구를 데리고 가도 다들 좋았다고 한다. 물론 좋아할 만한 사람과 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겨울에 임진강이 얼면 터엉 텅하고 깨진 얼음 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정자 아래 강은 철책으로 막혀있다.

 

황희 선생은 개성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4명의 고려왕과 조선 문종까지 9명의 왕을 거쳤다. 고려 우왕 때 14세에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해 87세까지 74년간 관직생활을 했다. 휴직과 파직기간을 감안하더라도 일생을 관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하는데, 69세에 영의정 자리에 올라 19년간 재직하며 성군인 세종의 빛나는 업적을 보필했다. 세종과 황희는 군신관계의 모범이 되었다.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는 것은 장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칭병, 비방, 늙음 등으로 사의를 표했으나 윤허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상에도 그러했다.

만년에는 고령으로 공무수행을 감당키 어려우면서도 국록을 축내고 있는 것을 매우 민망하게 여겼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늘 소용돌이 속, 황희 선생도 파직과 유배, 복직을 거듭했다. 교하와의 인연은 이곳이 그의 유배지였다는 것, 태종 때 세자 양녕대군 폐출불가론을 주장하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교하로 유배되었다가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이배된다. 이후 세종 때 직무소홀로 죄를 받은 이를 두둔하다 파직되어 반구정으로 물러났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평가 뒤에 뇌물과 청탁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는 비리도 전한다. 세종은 그의 허물을 자주 덮어 주었다. 그의 과실보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두둔은 왕이 작은 과실로 대신을 내치지 않는 사례가 되었다. 90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허례허식을 일절 금해 죽어서까지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황희 선생 묘역은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금승리 묘역을 찾았다. 재실로 올라가는 길가에 배꽃도 가득하다. 봄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왔다. 오얏 꽃이다. 땅을 봐도 하늘을 올려다봐도 온통 꽃 천지였다.

 
김연숙: 60년 서울생, 파주 운정에서 7년차. 걸으면서 자유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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