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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5) 8. 율곡과 우계, 그들이 맞은 전란 (2) 도망한 자, 남은 자

입력 : 2021-04-02 07:56:32
수정 : 2021-05-12 07:47:57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5)

 

8. 율곡과 우계, 그들이 맞은 전란

(2) 도망한 자, 남은 자

 

 

임진강에 어가가 도착했다. 4월 그믐, 칠흑 같은 밤이었다. 앞뒤로 길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왕이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문득 왕이 통곡을 멈추고 물었다.

성혼의 집이 어디에 있는가.”

신하가 율곡의 정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저 집입니다.”

어째서 나와 보지 않는 것인가?”

이런 때에 어찌 나오겠습니까.”

왕은 몹시 괴이하게 여기며 강을 건넜다.

 

선조실록은 왜란을 피해 임진강을 건너던 왕이 우계 성혼의 집을 묻는 장면을 기록한다. 화석정에 불을 놓은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이 장면은 사실이다. 율곡은 죽어서까지 왕을 지키는데 우계는 아는 척도 안 한다.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계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부름은 여러 차례 받았다.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해야 한다. 우계도 이를 의식했다. 돌고 돌아 그해 11, 우계는 의주 행재소로 선조를 찾아간다. 그리고 왕이 임진강을 건너던 그때의 일을 고한다. 우계는 너무 갑작스럽고 소식도 몰라서 문안하지 못했다며 죄를 청한다. 선조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우참찬이란 벼슬을 내린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조정이 서울로 돌아온 뒤 성혼은 사직상소를 올린다. 선조는 왜적을 평정하고 세상을 편안하게 하라며 사직을 말린다. 그런데 그 앞에 한 말이 무섭다.

(우계)의 상소를 보았다. 처음 변란이 일어나자 어쩔 줄 모르고 거가가 피난하게 되었는데 경의 여사 앞을 지나는데도 경이 나와서 문안하지 않기에 스스로 죄가 무거운 줄을 알고 죽으려 하였으나 죽지 못하였다. 지금 경이 들어오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겠다.(선조 271594324)”

네가 문안하지 않아서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비상한 시국에 처해 겉으로만 용서를 말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계는 더 깊이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계는 초야로 물러난다. 국란 중에 물러난 신하들에게 죄를 물으라는 조정의 결정이 있었지만 왕은 그 명단에서 우계를 지워버린다. 더 큰 죄로 묻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우계가 죽은 뒤 그의 관작은 삭탈된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저런 죄를 물을 것 없다. 임금을 저버린 죄 하나면 된다.”

 

파주 늘노리 우계 성혼의 집터

 

왕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우계를 압박한다. 정치에 닳고 닳은 왕, 선조에게 시골선비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왕의 노골적인 압박에 우계는 달리 변명할 길이 없다. 정황은 행재소에서 왕을 만난 때 아뢴 그대로지만 말할수록 구차해질 뿐이다. 의리대로 처신하며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사건에 응대하기보다 모든 사건을 자신을 닦는 계기로 삼는 태도, 우계의 삶에 일관되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우계를 위한 변명은 사후 그의 제자들이 한다.

우계의 집은 나루에서 이십 리 떨어져 있어 어가가 지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신하가 가리킨 것은 율곡의 정자이지 우계의 집이 아니다. 또 민간에는 도성을 지킬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왕이 워낙 빨리 달려서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요동으로 간다는 말이 퍼졌다. 그리고 임진강을 건넌 뒤 인가를 철거해 통행할 수도 없었다.”

우계에 대한 변명이지만 한편으로 왕에 대한 항의처럼 들린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남았던 사람에게 도망한 왕은 왜 그토록 집요했을까? 권력의 속성일까? ‘비겁한 권력은 힘없는 백성에게 용감하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한국전쟁에서 되풀이 된다.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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