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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12] 조선족의 판소리- 유네스코 비물질문화유산 등록

입력 : 2020-04-02 08:11:46
수정 : 2020-04-02 08:30:31

이해와 오해  [112]
조선족의 판소리- 유네스코 비물질문화유산 등록

박종일 저술가

 

▲ 조선족 판소리 내몽골에서 울려퍼지다- 사진출처 : 료녕신문


판소리는 1964년에 한국정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북한에서는 판소리에 대한 연구나 전승에 관한 열의가 얕다. 판소리의 발생지가 남쪽이란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판소리는 남녀의 소리구분이 없고 소리도 거칠어 우리시대 인민의 사상과 정서에 맞지 않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평가다(김정일선집259). 20115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판소리를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였고 중국정부는 201911월 판소리를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3종 성악)으로 지정했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한·중 양국의 공통문화유산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 문화처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길림, 요녕, 흑룡강성 조선족 집거지역에서 판소리를 할 줄 아는 예인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소리를 채록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때 세상에 알려진 소리꾼들이 박정렬(朴貞烈), 우제강, 조충남, 신옥화 등이었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들이 강사진을 구성하여 (민족성악 전공반에서) 전수자 교육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창작 판소리가 출현했다. 이때 나온 작품들이 장백산인삼, 낭군의 사랑, 천지(天池)유람기, 형장의 총성등이다. 창작 판소리의 소재는 현실생활이었고 창법도 탁한 소리에서 맑고 높은 소리로 바뀌어갔다. 이때 배출된 걸출한 2세대 소리꾼 가운데 한사람이 강신자이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사회를 비껴가지 않았다. 연변예술학교는 1966~1972년 동안 휴교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1978년 민족성악반도 다시 문을 열었고 박정열의 소리 채록집을 재정리하여 교재로 사용했다. 1986, 2세대 소리꾼 강신자가 연변예술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그의 문하에서 재능 있는 3세대 소리꾼들 변영화, 최여령 등이 배출되었다.

 

▲ 연변대학 예술학원 강신자교수

강신자(姜信子, 1941년 출생)1958년부터 박정렬 등으로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던 판소리를 전통방식으로 배웠다. 30여 년 동안 판소리를 독학으로 연구하며 스스로 이론을 세워나갔다. 연변대학 예술학부(연변예술학원), 연변가무단, 두만강창극단에서 가르쳤다. 5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5회의 판소리 발표회를 열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연변 TV에서 판소리 교육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최여령(崔麗玲, 1982년 출생)13살 때부터 연변예술학원에서 강신자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였고 명창 안숙선 문하에서 배웠다. 2010년 이 학교에서 판소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06, 중국 중앙TV가 개최한 제14회 청년가수 경연대회에서 판소리 흥부가의 한 단락을 불러 결승에까지 올랐다.

변영화(卞英花, 1983년 출생)도 연변예술학원에서 강신자로부터 배웠다. 2006년에 청년가수 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고 이때 부른 노래는 아리랑, 진달래, 새타령이었다.

조선족은 국적은 중국이지만 역사 문화의 뿌리는 우리와 함께 하는 동포이다. ·중관계의 부침에 따라 조선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부침한다. 그래서 같은 전통문화를 지켜낸 조선족의 노력을 부분적으로나마 돌아보려한다.

(이 글은 많은 부분을 녕영[寧穎]중국 서안음악학원 부교수의 논문 연변조선족 남도판소리 전승연구[2009, 중앙민족대학 석사학위논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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