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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③ 장준하 공원

입력 : 2016-08-18 15:54:00
수정 : 0000-00-00 00:00:00

한국광복군에서 민주화투사로 ‘장준하’

 

●문화재명: 장준하 공원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서 내려와 파주 트레이닝센터의 남쪽 끝에 이르면 장준하 공원을 마주하게 된다. ‘장준하’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겠지만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의 삶을 살펴보자.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인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교사 활동을 하는 관계로 삭주, 선천 등지로 옮겨 다녔다. 평양의 숭실 중학교에 합격한 뒤에는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여러분, 열여섯 살인 저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농촌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신지식을 전해 주는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그 후 중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정주의 신안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얼마 뒤 친구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한국광복군(노능서,김준엽,장준하).

 

한국광복군의 일원이 되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학도병제를 만들어 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때 장준하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훈련을 받은 뒤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아니, 우리들이 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지?”

“그래 이건 아니야. 우리 탈출을 하는 게 어때?”

 

장준하는 한인 친구들과 함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원들을 만났고, 임시 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에도 입대하였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한국 광복군에 입대한 장준하는 미국 전략 정보국이 진행한 특수 훈련을 받은 뒤 국내 진공 작전(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렇지만 원자폭탄을 두 번 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국내 진공 작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사상계

 

『사상계』 발행, 독재정치에 맞서다

장준하는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원들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조국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단되었고, 남북 간의 갈등으로 6·25 전쟁이라는 참혹한 경험을 하였다. 장준하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동서양의 올바른 사상을 보급하려는 뜻에서 『사상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태와 민권 탄압을 비판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계기로 수립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잡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사상계』 가 매진이네. 구할 수가 없네. 어떻게 된 거지.”

 정부에서는 사상계를 대량으로 주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못 보게 하고, 또다시 대량으로 반품하여 경영을 어렵게 했다. 결국 세무조사를 한답시고 트집을 잡아 폐간시키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헌법을 고쳤다. 이것이 1972년에 공포된 유신 헌법이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 헌법을 반대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정치인들을 탄압하였다.

 

“유신 헌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이에 백만 명 국민의 서명 운동을 시작한다.”

장준하는 유신 헌법에 대한 반발로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헌법 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장준하에게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을 선고하였다.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 전개

장준하는 건강 악화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근 1년 만에 출소하였다. 건강을 챙기던 장준하는 친구들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갔다.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등산을 하던 중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실족사 치고는 머리에 동그란 자국 외에는 외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장준하의 시신은 곧 광탄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그 후 장준하가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임을 밝히려는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두 차례 꾸려졌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한 사망인지 실족사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직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장준하 두개골

 

어찌됐든 장준하는 식민지하에서 고통 받는 국민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광복 이후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독재 정권에 맞선 인물이다. 며칠 있으면 그의 41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그의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나들이 때 한번 들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글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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