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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가을 햇살에’

파주사람ㆍ에세이 | 작성일: 2020-10-03 01:38:09 | 수정일: 0000-00-00 00:00:00

가을 햇살에

 

 

 

      박노해

 

 

      나의 날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나의 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나의 벗들은 다 어디에 있나 

 

      즐거운 만남도 설레는 여행길도

      함께 모여 담소하고 슬퍼하고 격려하던

      우리 인생의 날들은 다 어디로 갔나 

 

      가을이 온다

      그래도 가을이 온다 

 

      긴 먹구름과 암울한 공기를 뚫고

      노란 산국화는 향기를 날리고

      들녘의 벼들은 서로를 어루만지고

      사과알은 햇살에 볼이 붉어지고

      가시를 벗고 툭 알밤이 한번 웃고 

 

      그래도 가을이 오는구나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오는구나 

 

      비상계엄 같은 세계 속에서도

      진실하게 살고 사랑한 사람들 

      버려야 할 것을 단념하고 

      지켜야 할 것을 품에 안고

      함께 앞을 보며 이어져온 사람들 

 

      관계만 튼튼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사람만 신실하면 반드시 때는 온다

      근본만 굳건하면 꽃피는 날은 온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다 관계에서 오니까

      인생의 절망과 희망은 다 관계에서 오니까 

 

      세상 어디에 있든 그 어디에 있든

      관계만 튼튼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관계만 깊어지면 우리는 다시 산다 

 

      가만가만 걸어오는 가을 햇살에

      가을볕에 익어오는 붉은 볼들에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가을 햇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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