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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03]  제니 린드, 넬리 멜바, BTS

입력 : 2019-06-28 08:45:16
수정 : 2019-06-28 08:49:04

이해와 오해 [103] 

            제니 린드, 넬리 멜바, BTS

번역가, 자유기고가 박종일

19세기 유럽의 가장 특징적인 예술형식은 오페라이다. 오페라는 서기 1600년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생겨났는데 여러 우수한 오페라 작품이 잇달아 세상에 나왔지만 이탈리아 밖에서 오페라의 문화적 지위는 대단치 못했다. 글뤀과 모차르트가 등장하고 나서야 오페라는 가장 고상한 무대예술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오페라는 19세기 3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고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세계화는 일직부터 막을 열었다. 1830년 무렵의 파리는 유럽 예술의 수도였다. 파리에서 명성을 얻으면 그것이 바로 세계적 명성이었고 파리에서의 실패는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다름없었다. 1861, 당시 확고한 명성을 누리든 바그너와 그의 작품 탄호이저는 파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일지기 19세기 30년대에 유럽의 오페라가 오스만제국에서 상연되었다. 1828, 저명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형 주세페가 이스탄불 술탄의 궁정악단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는 현지에 유럽풍의 악단을 만들었다.
 

▲ 브라질의 아마존 마나우스 오페라 극장


독립왕국인 브라질에서 1840년 이후 페드로 2(Pedro II) 의 통치시기에 오페라는 국왕이 지원하는 공식 예술형식이 되었다. 벨리니의 노르마가 이곳에서 여러 차례 상연되었고 로시니와 베르디의 작품도 무대에 올려졌다. 브라질이 공화국이 된 후 1891~1896년 사이에 고무농장으로 천문학적 부를 모은 인물이 당시에는 아마존 원시림 깊은 곳이었던 마나우스에 호화찬란한 오페라극장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짓는 데는 세계 각지에서 최고의 자재가 동원되었다.

 

 

▲ 하노이 오페라극장 

오페라는 바다건너 식민지에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문화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식민지에 당당한 오페라극장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서 가장 웅장한 건축은 1911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1875년에 준공된 파리의 가르니에 오페라극장을 모방하여 건조되었다. 가르니에의 객석 수는 2,200석으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다. 하노이 오페라극장의 객석 수는 870, 이 도시에 거주하던 프랑스인이 4,000명이 안 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극장 건축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가 북미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앞에서 소개한 지역보다 빨랐다. 1859,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오페라하우스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오래 동안 이 극장은 신대륙에서 가장 호화로운 극장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인구가 6만이었던 도시 로스엔질리스에도 오페라 열풍이 불었다. 1860년 한 해 동안 이 도시에서 팔린 오페라극장 입장권은 219천 장이었다. 1883년에 완공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밀라노의 라스칼라, 파리 오페라극장과 나란히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이 되었다고 동시에 미국 상류사회의 자기과시 무대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의 공연 레퍼토리는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1935년 작)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부 유럽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미국 작곡가가 오페라나 뮤지컬에 공헌한 바가 거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도 오페라의 열풍이 불었다. 19세기 30년대에 칠레에서 로시니 열풍이 불었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19세기 70년대부터 서양음악 보급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1875, 한 이탈리아 여가수가 도쿄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 극장의 좌석 점유율은 참담했고 심지어 공연 중에 찍찍거리는 쥐 소리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1894년에 유럽의 오페라가 일본에서 처음 상연되었다. 공연작품은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몇 장면을 발췌한 것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든 뒤 점차로 안정적인 오페라 관중집단이 형성되었고 1911년에 완공된 첫 번째의 대형 서양식 오페라극장이 오페라 연출의 고정 무대가 되었다.

 

▲ 스웨덴의 꾀꼬리 제니 린드 


19세기에는 세계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하는 오페라 스타가 일종의 특수 신분으로 등장했다. 1850년에 스웨덴의 꾀꼬리라 불리던 제니 린드가 93회로 예정된 세계 순회공연에 나섰을 때 첫 번째 공연지인 뉴욬에서는 7천 명의 관중이 극장을 찾았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넬리 멜바

 

오스트랄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미첼예명을 고향 멜번에서 따와 넬리 멜바라고 지었다1887년에 유럽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진 후 짧은 시간 안에 스타가 되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륙의 경계를 뛰어넘은 음악 스타의 첫 번째 사례에 속한다. 1904년 이후로 그는 음반 취입이란 방식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복제했다. 당시까지 아직 미개하다는 평을 듣던 자신의 조국에서 멜바 부인은 문화적 자신감을 세워준 우상이 되었다. 19세기의 유럽 오페라는 한때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BTS

 

금년 초부터 나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 BTS의 공연 행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상파울로, 뉴욕, 도쿄에서 런던, 파리로 이어지는 공연 여정에서 그들은 한국어로 노래 부른다. 그들이 가는 곳,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기가 문화의 역류시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2세기 전 오페라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흐르던 그 길을 역순으로 한국의 아이돌그룹이 공연투어를 하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엔 십만을 헤아리는 관중이 환호한다. 당대의 스타 제니 린드도 넬리 멜바도 이런 환영을 누리지 못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오페라가 확산되어온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BTS가 몰고 다니는 열풍이 무얼 의미하는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다.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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