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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98] 서대문 형무소를 닮은 여순감옥

입력 : 2019-01-23 11:52:21
수정 : 2019-05-10 10:27:33

이해와 오해 [98]

여순(旅順)감옥

박종일

 


청일전쟁(1894~1895)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청과 일본이 붙은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의 처지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거인과 같았다. 제국주의 열강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앞 다투어 달려들어 거인의 사지를 찢고 피와 살점을 삼켰다. 그들은 서로 간에도 먹이를 놓고 격렬하게 싸웠다.

이홍장(李鴻章)이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북양군(北洋軍)이 이 전쟁으로 궤멸했다. 요동반도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인 여순항은 북양군 함대의 모항이었다. 전쟁 뒤처리를 위해 청일 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은 대만과 팽호열도와 요동반도를 일본에게 할양했다. 유럽에서 발칸반도 진출을 저지당하자 극동에서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일본 정부에게 요동반도 점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러시아를 우두머리로 하는 3국 연합에 맞설 군사적 실력이 없었고 미국과 영국도 실력으로 일본을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일본은 3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국간섭의 대가로 독일은 청에게 산동반도 교주만을 조차지로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러시아도 3국간섭의 대가에다 더하여 독일을 견제한다는 논리로 산동반도 맞은편 요동반도의 여순항과 대련항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요옹반도까지 확장시켜 만주와 조선을 세력권 안에 두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는 운남성과 광동성에서 독점적 상업이익을 확보했다. 3국이 미리 일본과 협의하여 정한 방안을 따라 일본은 청으로부터 은화 3천만 냥을 받고 요동반도를 포기했다. 일본은 이 자금으로 해군의 군비를 대폭 확충했고 그 결과 10년 후 러시아와의 전쟁(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10년 동안 일본의 국가목표는 와신상담이었다.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여순항을 차지했다. 이제 조선을 차지하는데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어졌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에는 합병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직접 식민지로 만들었다.

여순감옥은 러시아가 여순을 차지한 후 위수(衛戍)감옥으로서 짓기 시작하였으나(1902) 완성하지 못했고 그 기초 위에 일본이 완성하였다(1907). 서대문형무소도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는데 그래서 두 감옥은 출생의 내력은 물론이고 건물의 구조도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

1909년에 가을, 러일전쟁 종전 후속처리를 위해 러시아 정부가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헸다. 러시아 재무상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던 이토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저격을 받아 숨졌다.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안의사는 피해자인 일본당국에 이첩되었고 그 후 여순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안의사의 이토 저격은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지금도 여순감옥에는 안의사 기념관이 마련되어있다(정확한 명칭으로는 여순의 국제전사國際戰士在旅順진열실). 여순감옥은 중국현대사에서도 수많은 (중국) 애극지사가 희생된 곳이라서 중국 정부에 의해 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되어 있어 전국 각지에서 학생,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참관하러 오고 있다.

그런데 국제전사 진열실에는 안중근 의사 말고도 여순감옥에서 처형되거나 옥사하거나 복역한 한국의 독립애국지사들 신채호(申采浩, 1936년 옥사), 이회영(李會榮, 1932년 옥사), 최흥식(崔興植. 관동군사령관암살시도, 1932년 처형), 유상근(柳相根, 관동군사령관암살시도, 1945년 옥사), 우덕순(禹德淳. 안중근의사 공범, 1909~1915년 복역), 유동하(劉東夏, 안중근의사 공범, 1909~1911년 복역), 조도선(曹道先, 안중근의사 공범, 1909~1911년 복역) 등의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여순과 여순감옥은 한중 양국의 근대사에서 이처럼 매우 심대한 상징성을 가진 지역이며 유적이다. 그런데 국제전사 진열실에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인물 이외에도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 애국지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거나 복역했다. 그런 인물들로서 최근까지의 한중 양국의 전문연구서와 국가보훈처 수훈자 기록을 통해 이름과 행적이 확인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황덕환(黃德煥, 신민부新民府 모금대장, 1929년 처형), 김원국(金元國, 정의부正義府 2의용대장, 복역), 백여범(白汝範, 정의부 의용대원, 복역), 손기업(孫基業, 조선혁명당총동맹, 관동군사령관 암살미수, 10년 복역), 이창룡(李昌龍, 손기업의 공범, 10년 복역), 박민항(朴敏杭, 손기업의 공범, 옥사), 박희광(朴喜光. 일본총영사관 폭파미수, 민족반역자 처단, 20년 복역), 채세윤(蔡世允. 신민부 별동반장, 민족반역자 처단, 10년 복역), 이필현(李弼鉉. 신채호선생과 함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활동, 옥사). 중국 측이 1955년 뒤늦게 발견한 일부 수감인원 1,248명의 명단에만도 박 씨가 25, 김 씨가 84명이 나와 한국인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못했다.

금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국제정치의 비정한 전개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자.

 #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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