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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96]   중국 백과사전에 수록된 ‘이철부(李铁夫)’

입력 : 2018-11-28 15:58:26
수정 : 2018-11-28 16:00:46

이해와 오해 [96]                                                                                                    

중국 백과사전에 수록된 이철부(李铁夫)’

 

 

 

1937710. 중국 섬서성 연안의 홍군 휴양소에서 폐결핵과 장티푸스에 걸려 입원한 36세의 조선 청년이 숨을 거두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위해 성대한 추도식을 열었고 그는 연안의 청량산(淸凉山)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이철부였다. 그는 중국공산당 천진시당 서기를 역임했고 하북성 당위원회의 주요 책임자였다. 그 무렵 중국에서 활동하던 각국의 혁명가들로서 중국공산당 조직 내에서의 직위가 가장 높은 인물이 그였다. 이철부(1901~1937)의 본명은 한위건(韓偉鍵)이고 김원호(金元鎬), 호국명(胡国明), 한국이(韓國李)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그의 이름과 활약상은 중국의 가장 권위 있는 백과사전 사해(辭海)’에도 수록되어 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학생독립운동 지휘부의 한사람이었던 이철부는 독립선언문을 읽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상해에서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신대한신문을 편집했다. 1920, 그는 신분을 위장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을,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4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기자로 신분을 확보하고 조선공산당을 창건하는 일에 매달렸다. 1926년 봄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2월에 경찰의 단속에 걸려 당이 파괴도자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와 도움으로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직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 이철부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북평으로 가서 당의 외곽조직인 북평반제국주의대동맹의 서기를 맡았다. 이때부터 그는 6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지방조직에서 주요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329월 이후로 그는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과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3년에는 하북성 당 조직이 파괴되고 그는 국민당 장국에 체포되어 남경 감옥에 갇혔다가 당 조직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풀려난 그는 신분을 위장하여 천진으로 잠입하여 당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남개(南開)중학 교사인 젊은 여성 장수암(張秀巖,1895-1968)과 부부로 행세하였는데 실은 당의 지시에 따른 위장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당의 승인을 얻어 결국 진짜 부부로 맺어진다.

1931년 일본이 9.18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점령하자 공산당 북방지도부는 공개적인 극좌노선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당 조직이 파괴되고 많은 당원이 체포 희생된다. 이철부는 여러 차례 글을 통해 극좌노선에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은 당내에서 철부노선이라 하여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당 지도부는 19343월에 이철부에게 최후의 경고를 내리고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의 노선을 지지한 사람들도 엄중한 처분을 받았고 이철부 자신은 우경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당에서 축출되었다.

19363, 천진시당이 재건되었다. 장수암은 시위원회 부녀부장이 되었다. 유소기(劉少奇)가 당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북방국을 지휘하면서 좌경노선은 폐기되었다. 이철부도 당적을 회복했다. 일본이 화북지역에 병력을 증파하자 이철부는 반일 선전전을 활발하게 벌이고 군중시위를 조직하여 많은 성과를 냈다. 유소기가 지도하는 북방국은 이철부의 노선과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당 하북성위원회 위원겸 천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장수암은 당 시위원회 부비서장이 되었다.

19375, 이철부는 연안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때 모택동을 그를 불러 모함곤경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묵묵히 당을 위해 일한 이철부 부부의 헌신을 높이 평가하며 철부노선이 옳았다고 인정하였다. 오래고 험난한 지하활동으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있어서 당은 그에게 휴양을 명령했다. 휴양과 치료도 효과가 없어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당은 장수암에게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으나 결국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이철부 부부모습 

 

해방이후 한국과 중국은 정치적 이념의 차이 때문에 반세기 이상 반목하였다. 그러나 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운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중국의 공산혁명 과정에는 조선 혁명가들의 헌신이 결코 가볍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 공유의 경험과 추억은 지금이라도 제 모습대로 온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이철부처럼 새로운 시대와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젊음을 바쳐 열정적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혁명가들은 이념에 상관없이 평가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이광수의 회고에 따르면,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든 자리에서 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일부 원로들이 중간에 퇴장하려하자 “3.1운동을 배반하면 안 된다고 눈물로 호소하며 문을 가로 막아선 청년의 이름이 한위건, 바로 이철부였다고 한다. 한국의 공산당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조선공산당 당수 가운데서 지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인물이 한위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지혜의 숲 권독사 박종일 

# 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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