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이해와 오해 [95]  중국 국민혁명과 조선혁명가들

입력 : 2018-10-22 18:06:20
수정 : 0000-00-00 00:00:00

이해와 오해 [95] 

중국 국민혁명과 조선혁명가들

지혜의 숲 권독사 박종일


 

중조인민혈의 정 전경 


중국현대사에서 1924에서부터 1927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북양군벌 통치를 반대하여 일으킨 정치 군사운동을 국민혁명이라 하는데 1차 국내혁명전쟁또는 대혁명이라고도 부른다. 192331일 손중산(孫中山)은 광주(廣州)에 육해군대원수 대본영을 설치하고 이듬에 1월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한다. 이 대회에서 공산당이 기초한 반제반봉건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선언이 채택되고 삼민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국공합작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광주는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이 모여드는 성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조선 지식청년들은 중국혁명의 새로운 고조기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조선혁명 성공의 전제라고 믿었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張志樂)의 회고에 따르면 1925년의 광주에는 6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1927년 이후로 광주의 조선인은 약 800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혁명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지식인이었고 나이가 가장 어린 자는 14. 가장 많은 자는 40, 평균 연령은 23세 전후였다. 그 중 400여 명은 만주지역에서 온 독립군이었고, 100여 명 이상이 시베리아에서 왔고(30여 명은 모스크바에서 직접 왔다), 100여 명은 조선 본토에서서 왔고, 20여명은 일본에서 왔다. 상해 조선공산당과 시베리아 조산공산당 당원인 사람이 80여 명이었다. 1926년 봄에 김약산(金若山), 김정창(金貞昌), 김산이 주도하여 당파를 초월한 조선인 혁명가의 조직(‘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손중산 휘하의 광주 정부 각 부문에 조선인들이 참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부문이 황포(黃峬)군관학교였다. 이 학교 제3(1925. 6.~1926.1.)에는 조선인 학생이 4, 4(1926. 6.~1927.1.)에는 24, 5기에는 6명이 있었다. 교관 가운데도 조선인이 있었다. 양림(楊林, 본명 김훈金勛)1925년에 광주에 와서 이 학교의 교관이 되었고 제3기 학생대장을 맡았다. 1925년에 광주에 온 김산도 이 학교의 교관이 되었고 1926년에 모스크바에서 온 오송윤(吳松尹)은 이 학교 러시아어 교관이 되었다. 북벌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워 철군(鐵軍)’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은 장발규(張發奎) 장군의 국민혁명군 제4군의 선두부대는 섭정이 지휘하던 독립여단이었고 이 독립여단의 제3대대장은 조선인 양림이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 청년들은 대부분 양림의 부대에 소속되었다. 김산은 이렇게 회고했다. “북벌군이 양자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흥분과 열정에 쌓여있었다. 중국 북방과 조선을 향해 진군하는 북벌군을 맞이하여 만주지역과 조선의 2천만 동포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설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9274, 국민당 우파가 중심이 되어 공산당과의 합작을 파기하였고 장개석(蔣介石)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반발하여 공산당은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소비에트정권을 세우고자 폭동-19278월의 남창(南昌)봉기와 12월의 광주봉기-을 일으켰다. 남창봉기에는 김약산 등이 참가했다. 광주봉기의 주력은 제4군 교도(敎導)여단이었다. 이 여단 제2중대는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고 김규광(金奎光)이 중대 당대표였다.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광주에 있던 조선인 가운데서 4명의 부녀자와 10명의 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광주봉기에 참가했다.”광주봉기에 참가한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병력 200여명 가운데서 150명이 조선인이었고 이 부대 제2중대장은 조선인 최석천(崔石泉)이었다. 소련 홍군대학 졸업생 이영(李瑛)은 섭정부대의 참모장으로서, 모스크바 군사학교 졸업생 양달부(楊達夫)는 포병부대장으로서, 황포군관학교 제3기 졸업생 이빈(李彬)은 포병장교로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그밖에도 군공을 세운 장교로서 오성륜(吳成侖), 박진(朴振), 박건웅(朴健雄) 등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중산대학에 재학중이던 조선인 학생은 전원이 봉기에 참가했다. 어떤 추계에 따르면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은 최소한 250명이라고 한다.

1
927
12, 광주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봉기군 주력이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해 퇴각할 때 광주에 남아 엄호한 부대는 전원이 전사했고 전사자 가운데는 조선인이 150명이었다.

1964, 광주시는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 동지들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세웠다. 인민해방군 원수 섭검영이 쓴 기념비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271211, 광주의 노동자들과 혁명전사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무장봉기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전사 가운데는 조선 청년 150여 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전우와 함께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싸웠다. 그들은 마지막 사하(沙河)전투에서 대부분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음으로서 위대한 무산계급 국제공산주의 정신과 두려움을 모르는 혁명영웅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 동지들의 이름이여 영원하라!

중조 양국인민의 전우애는 만고에 푸르리라!”

20세기 전반기에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투쟁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념 갈등으로 왜곡되기 이전의 소중한 역사적 공동유산을 더 깊이 연구하고 제대로 정리하여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보다 차원 높은 상호 이해를 위하여.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