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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소득에 관한 고정관념들을 뿌리에서부터 재고하자! - 기본소득은 ‘시민배당금’

입력 : 2020-09-09 06:50:13
수정 : 0000-00-00 00:00:00

노동과 소득에 관한 고정관념들을 뿌리에서부터 재고하자!

-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을 영위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생각.

- 기본소득은 시민배당금

-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이 2014425일 가장자리협동조합 주최의 강연 녹취기록

 

 

지금 철학적으로 우리가 왜 기본소득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도 활발히 논해야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지니까 기본소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기본소득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해서 거기에 대한 대가로 소득을 얻어 생계를 꾸려간다는 공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런 고용-임금-생활이라는 구조가 더 이상 성립이 안 되게 된 거죠.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말이죠. 지금 우리는 실제로 잠재적으로 모두 실업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정규직 노동, 정규 소득을 전제로 하는 연금제도 같은 것도 죄다 붕괴될 게 분명합니다.

 

지금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인구 감소 현상을 크게 걱정한 나머지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고 보조금이라도 줘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생각해 보세요. 인구를 자꾸 늘려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세계인구는 지구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벌써 넘어섰다고 하는데, 연금제도니 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생산-소비 인구를 유지하겠다고 자꾸 인구를 증가시키는 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뭔가 근본적인 전환을 생각해야지 고식적인 방법을 계속하겠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지요. 더욱이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하는 형편에 아이들을 많이 낳아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죠.

 

그런데 방향전환을 하는 데 큰 걸림돌이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 왔던 생각, 즉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소득은 노동의 대가라는 생각에 너무나 깊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이제 낡은 것이라고 냉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신성(勞動神聖)이라는 관념은 생산성이 낮았던 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때는 그 생각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오히려 지나치게 높은 생산력이 큰 문제이고, 실제로 소득의 불평등, 빈부격차, 그로 인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상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나친 노동, 지나친 근면은 도리어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 마르크스라는 복잡한 사람 잘 알죠?(웃음) 그 마르크스의 사위가 폴 라파르그라는 사람인데, 라파르그가 쓴 책으로 게으를 권리라는 게 있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을 썼죠.

 

이제는 사람들이 다 같이 좀 게으르게 살아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생산 기술력은 엄청난데, 사람들이 부지런히 그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매진한다면, 과잉생산과 넘쳐나는 물자로 세상은 오히려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산과 소비, 노동과 소득에 관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종래의 고정관념들을 뿌리에서부터 다시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사람은 일을 해야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롭게 생을 영위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사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본소득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 일정한 기초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지급하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이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데 또하나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왜 부자에게도 줘야 하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예를 들어 재벌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은 종래의 인습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실제로 빈부 가리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무조건 밥을 주자는 무상급식 논리도 아직까지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할 의사도 없는 사람한테까지 왜 기본소득을 주며, 부자들에게도 왜 기본소득을 줘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설령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계속될 질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어, 선별을 한다면 수급자의 자격 여부 심사에 과다한 행정비용이 듭니다. 또한 자격심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른바 낙인효과라는 것이죠.

 

그리고 소득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초 생계비를 지급하는 현행의 국가복지 프로그램에서는 소위 복지의 덫이라는 현상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을지라도 급료가 적으면 사람들은 그 일자리를 포기하고 국가가 주는 기초 생계비에 의존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건 비난할 수 없는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제가 실시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죠. 일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비록 급료가 적더라도 누구나 기꺼이 취직을 하거나 자신의 일을 만들려고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런 합리적인설명들로써도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을 겁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고정관념이 집요하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걸림돌, 의구심을 한꺼번에 넘어설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 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 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그때그때의 수입에 따라 연간 3천 달러 혹은 어떤 때는 1천 달러 내외의 현금을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래스카는 미국에서도 변경지대이고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대략 5인 가족이 주류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족 전체로 보면 꽤 상당한 액수가 됩니다.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대개는 유전을 개발하고 석유를 생산할 자본과 기술이 있는 거대 석유회사에게 맡겨서, 그 결과 상층부 지배층과 자본가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체제를 만들어 온 게 현대사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관행입니다. 그러나 알래스카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공유자산이라는 인식을 철저히 한 바탕 위에서 고르게 나누는 길을 택한 것이죠. 이것은 알래스카의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주지사, 주의회, 주민들 전체가 이것에 합의를 봤다는 사실 자체가 알래스카의 가장 자랑스러운 점이고,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죠.

 

이 알래스카식 기본소득 모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경제학자로 칼 위더퀴스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학자의 논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알래스카 영구기금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석유자원 유무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라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 어떤 가난한 나라라 할지라도 기본소득제를 시행하지 못할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라는 거죠. 사실 어떤 나라든지 부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생산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부를 창조해냅니다. 그런데 그 부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형성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공동으로 상속받은 토지, 자연자원, 문화, 전통, 역사 등등, 그러한 것이 근본적인 토대가 되어 그 위에서 부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부를 생산하는 데 끼친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공로는 일정하게 인정하되 전체 부의 상당부분은 공동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갖는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으면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서의 배당금이라고 간주할 때, 그 배당금이란 결국 공동체의 공유자산이 만들어낸 이익에 대한 배당이라는 뜻입니다. , 그러면 이쯤에서 공유자산이라는 것에 좀더 생각해봅시다. 아까 제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외부를 찾아서 그것을 통해서 착취와 수탈을 계속하는 체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외부라는 게 무엇인가요? 국내든 국외든 결국은 미개발의 자연과 환경, 사회적 약자들의 노동력, 그리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하던 초기에 상당한 자본축적 과정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그것을 원시적 축적단계라고 불렀습니다. 웬만큼 자본이 쌓여야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큰 장사를 하든지 공장을 지어 물건을 생산·판매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런데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이 원시적 축적의 전형적인 형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소위 인클로저라는 것이죠.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이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생계를 도모하던 공유지(commons), 즉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동체의 공유자산을 권력자들이나 대지주들이 자기들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민중을 쫓아내며 구획을 짓는 행동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에는 초기단계의 일이라는 뜻도 들어있지만, 매우 난폭하고 야만적인 방법이었다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클로저는 어느 날 갑자기 힘센 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와서 가난한 농민들을 쫓아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이라는 이름 밑에서 집행했죠.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법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전횡을 감추기 위한 그럴듯한 포장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한 국가권력으로 민중의 삶을 짓밟으면서 그것을 법 집행이라고 한 거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개방된 들이나 숲이나 목초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먹이며 살아온 농민들을 하루아침에 법을 내세워 몰아내고 거기에 울타리를 친 다음에 양들을 키워서 당시에 발흥하고 있던 양모 산업과 연계하여 떼돈을 버는 게 그 무렵 영국의 귀족과 권력자들의 치부 방식이었습니다.

 

16세기 초에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쓴 기본 동기도 이 상황을 비판하기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모어 자신도 지배층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는 자기 시대의 엄청난 불의에 대해서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법관이면서도 모어는 작품 속에서 법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즉 유토피아에서는 법관이라는 존재는 설 자리가 없도록 설정합니다. 그건 이유가 있죠. , ‘인클로저에 의해서 삶터를 뺏긴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런던으로 몰려와서 빈민굴을 형성하고, 달리 연명해 나갈 방도가 없으니까 도둑질, 소매치기, 매춘 등등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당시 법관들은 이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심지어는 좀도둑질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모어는 범죄의 배경과 뿌리는 묻지 않고 사람들을 이토록 가혹하게 다루는 국가의 법질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법관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근대 유토피아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모어의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인클로저에 대한 비판으로 씌어졌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 근대세계의 출현과 함께 민중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공유지의 상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얘기가 되니까요. 자본주의 근대문명은 한마디로 민중의 삶의 터전인 공유지를 해체·파괴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발생했던 현상으로서 원시적 축적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그 원시적 축적은 바로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돼온 현상입니다.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그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활동가였습니다. 룩셈부르그는 자본은 그 창세기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유일하고도 항상적인 방법, 즉 폭력 이외에는 어떠한 문제 해결 방법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란 폭력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지금 밀양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세요. 비록 가난한 삶일망정 오랫동안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조용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시골 사람들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송전탑 공사라는 폭력이 가해졌잖아요. 물론 전기는 국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지만, 잘 따져보면 이것도 인클로저의 일종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전력 체계는 대기업에 일방적 이익을 안겨 주도록 교묘히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산업체계는 수출 중심, 대기업 중심이죠. 그런데 그 대기업들이 정당한 경영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번다기보다는 국가로부터 음성적인 수출 보조금을 엄청나게 받고 있잖아요. 법인세 감세도 그렇지만,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굉장히 싸게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전기요금체계를 보면, 산업용은 국제 평균보다도 훨씬 싸고, 가정용보다도 훨씬 저렴합니다. 그러면서 만날 한전은 적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대기업들한테 싼 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과연 그런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대기업들의 주주 상황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거의 다 외국인 주주들입니다. 국내 주주들이라고 해도 다 투기꾼 세력들입니다. 국민경제와 별 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들에게 싼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시골 사람들의 삶터를 짓밟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공권력의 힘으로 시골 사람들의 삶터와 생활을 박살을 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경제학에서는 자본은 잉여노동을 착취해서 확대재생산을 계속한다고 하는 착취론을 주로 말하고 있지만, 근본은 역시 공유지의 사유화, 민중 공동체의 해체라고 할 수 있어요. 몇 세기에 걸친 이 사유화 및 해체로 인해 민중은 스스로 자립하고 자치할 수 있는 공간과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어떻든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을 계속하는 동안은 알량한 임금이나마 받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올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늘 뒤로 미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경제성장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무엇을 잃고 뺏겨왔는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된 거죠.

 

최근 들어서 유럽, 미국을 포함하여 세계 각처에서 공유지혹은 공유재(자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공유지라고 하면 쉽게 토지나 목초지를 떠올리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弘文)가 말하는 사회적 공통자본도 결국은 공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체의 경제, 사회적 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한 인프라들도 알고 보면 전부 공유지 혹은 공유재에 속하는 것이죠. 철도, 도로, 항만, 공항, 가스, 전기, 통신, 의료 및 교육시설 등등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 혹은 공공기관이 공적 자금을 들여서 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가장 큰 재미를 보는 자는 자동차기업의 경영자와 주주들입니다. 자동차기업이 자기 돈으로 도로를 만들어서 자동차를 팔아먹으라고 하면 다 망하겠죠. 그러니까 제 얘기는 자동차기업에 대하여 도로라는 공공 인프라를 통해서 자기들이 획득하는 이익의 일부라도 공공기금을 위해서 내놓도록 설득하거나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래스카 영구기금같은 것을 만들어 기본소득 재원으로 하자는 겁니다. 도로뿐만 아니라 그 외의 공공 인프라, 공적 기관이 내는 이익을 모두 이런 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중이 잃어버린 공유지를 조금이라도 되찾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공공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화폐금융제도입니다. 화폐라는 것은 본래 공동체의 경제생활을 원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환수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대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한마디로 사적 이익을 취득하는 수단이 돼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자, 그것도 복리이자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평생 연구해오다가 최근에 작고한 마가레트 케네디라는 독일의 여성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을 보면, 독일의 경우 보통 물가의 3040퍼센트가 이자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생산업자는 은행에서 대부를 받아 설비도 마련하고 원료도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구해서 물건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물건은 유통업자를 통해서 도매점이나 소매점으로 옮겨집니다. 이 과정에 관계하는 모든 사업가는 자신이 직접 대부를 받았건 안 받았건 기본적으로 은행 대출금으로 돌아가는 이 경제활동의 연쇄 속에서 당연히 은행에 상환해야 할 이자에 해당하는 돈을 각 단계에서 가격에 추가합니다. 그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사는 물건의 가격에는 이 누적된 이자들의 합계가 반영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 총 이자분이 평균적으로 물가의 3분의 1 이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독일의 경우지만, 산업국가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그런 이자로 인해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 대다수 시민, 소비자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끊임없이 부를 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자제도를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어차피 부유층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부를 끊임없이 쌓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금융제도 때문입니다. 마가레트 케네디의 계산에 의하면, 이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서 독일에서 하위 80퍼센트에 속한 소득자들이 10퍼센트의 상위 소득자한테 지불하는 이자가 하루에 10억 유로라고 합니다. 1년이면 3,650억 유로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돈이 이렇게 저소득층의 주머니로부터 부유층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개인 대 개인의 부채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죠.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돈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와 동전이 화폐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대부분의 통화는 실은 은행이 대출해 준 돈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통화의 대부분은 부채라는 얘기죠. 그것도 때가 되면 이자를 붙여서 상환해야 하는 부채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부분준비제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부분준비제도란 은행이 대부를 해줄 때 금고에 그만한 돈이 있을 필요가 없이, 아주 일부분만 준비해 두면 된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100만원이 있으면 1,000만원 혹은 그 이상 대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게 신용창조라는 겁니다. 즉 실물의 현금을 미리 갖고 있어서 그중 일부를 대부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것은 현대 금융시스템이 돈을 만들어내는 통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용창조 행위, 즉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돈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국가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사립 민간은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간은행은 근본 관심이 사회의 공익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기업이 그렇듯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화폐를 대출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냄으로써 거기서 생기는 모든 이익을 사적 영리기관이 다 차지한다는 것, 이게 여러분은 이해되시는지요? 저는 여러 해 동안 화폐문제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봐왔지만,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국채라는 겁니다. 국가가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몇 가지 있죠. 세금, 국유재산 매각, 각종 수수료 수입 등등인데, 그중에서 현대 국가들이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좀 생각해 봅시다. 국가가 돈이 필요하면 그냥 화폐를 발행하면 될 텐데, 왜 국채를 발행하는가? 실제로 예전에는 어디서든 국가가 화폐를 주조하거나 찍어서 보급했습니다. 상평통보 같은 것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지폐 발행은 중국 송나라 황제가 처음 시작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권능으로 이게 돈이라고 증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어 돌리면 그게 화폐로서 효력을 갖고 중화권에서 통용되었습니다. 화폐란 게 별것 아니거든요. 공동체가 공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동전은 일본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일본 국가가 만들어 냅니다. 동전에 일본국이라고 발행 주체가 명기돼 있어요. 홍콩에서는 여러 종류의 지폐가 통용되고 있는데, 민간은행이 발행한 지폐도 있지만, 홍콩 정부가 직접 찍어낸 지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실제로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깁니다. 아니, 그게 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죠. 그런데도 왜 굳이 국채를 만들어서 이자를 물고, 그 부담을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안기면서 소수의 부유층만 갈수록 더 부자가 되도록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이 그런 방식으로 국왕으로부터 국채를 인수하면서 설립 인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관행이 지금까지 쭉 계속돼왔다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지금처럼 돈을 민간사립은행이 영리 목적으로 찍어내지 않고 정부나 공공기관이 직접 발행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어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선 이자를 비롯해서 화폐발행으로 얻는 이득(그것을 시뇨리지라고 합니다만)은 전부 공익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국채라는 것도 없어지고 국가는 복지, 교육, 의료 등등에 필요한 경비를 무상으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부채에 짓눌려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현대 금융제도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제도가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을 사회 전체에 강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의 금융화폐 시스템에서는 이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대출을 해야 하고, 대출금에 대해서 이자를 붙여서 상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반복되고 확대돼야 합니다. 이 과정이 순조롭지 않으면 시스템이 정지되고,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면 사회에 필요한 돈이 말라버립니다. 그러면 경제는 파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은행이 화폐 발행 주체가 돼 있는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삶이니 환경이니 하는 것은 전혀 고려사항이 될 수 없고, 오로지 경제성장이 지고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니까 현행의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두고는 세상의 평화와 생태계 회복은 요원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까 셰일석유 이야기도 했지만, 그런 막대한 환경파괴를 초래하는 광태의 배경에는 이러한 금융시스템이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똑똑히 봐야 합니다.

 

결국 해법은 금융시스템의 공공화, 혹은 은행의 공유화입니다. 원래 금융제도와 화폐는 공공재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죠. 그러나 그동안 이 부조리한 금융시스템으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겨온 기득권 세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2008년에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의 사기 행각이 드러난 뒤에 미국에서는 공립은행 설립운동이 시민운동 차원에서 지금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예전에는 공공은행이 많았고, 지금도 노스다코타 주립은행은 공공은행입니다. 그 결과로 노스다코타주는 현재 미국에서 재정이 가장 견실하고 실업률도 가장 낮다고 합니다. 원래 농민들의 신용협동조합으로 출발한 이 주립은행이 그 운영으로 인한 모든 수입을 노스다코다주의 공공프로젝트와 복지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제도와 화폐라는 공공재를 다시 민중의 것, 주민의 것으로 돌리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계산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사회가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거쳐 현재의 민간사립은행을 다시 국민 전체의 공유재산으로 만들어 공립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은 아무 걱정할 게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무튼 기본소득이라는 것을 도입하기로 합의만 한다면, 재원 마련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게 저나 기본소득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기본소득은 현실적으로 조만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본소득제가 실시되어야 우리사회의 어리석은 물질숭배와 경쟁과 효율 본위의 가치관도 좀 바뀌고, 사회적 관계도 많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제일 좋은 게 뭐냐면 노예노동이 종식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노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말 좋아서 일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이러고서야 인간의 자유롭고 존엄한 삶이란 건 공염불일 뿐이죠.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면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일생을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싶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정상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들의 자유롭고 여유 있는 생활이 보장돼야 민주주의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정말로 품위 있는 인간다운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당장에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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