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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가는 한걸음(1) 동서독 통일의 현장을 가다 1 - 독일의 월요기도회와 파주의 토요기도회

입력 : 2020-01-16 08:27:57
수정 : 2020-07-03 01:39:34

통일로 가는 한걸음(1)

동서독 통일의 현장을 가다 <1>

독일의 월요기도회와 파주의 토요기도회

 

들어가며

분단의 현장이자 통일의 관문이기도 한 파주.

2018427, 역사적 판문점 선언과 그해 9월의 문재인 대통령 평양방문으로 남북관계는 금방이라도 왕래 가능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남북교류의 길목인 파주는 통일의 관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설레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느라 고민했던 주민들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잇따른 북미회담 결렬과 남한의 군비확장 등으로 북한이 대남 강경책을 표방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금 긴장과 어색함이 맴돌고 있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걸음이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라 우리는 쉽게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파주에서는 한반도, 그리고 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뚜벅뚜벅 그 길을 밟아 나갈 것이다.

 

1. 독일의 월요기도회와 파주의 토요기도회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 사거리에 위치한 참회와속죄의성당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민족의 화해와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토요기도회를 해오고 있다.

20133월 처음 시작되어 202014348번째를 맞이한 토요기도회는 1982년 옛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를 본보기로 삼아 시작된 기도회이다.

지난해 여름 독일에서 공부하는 딸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갔던 나는 독일 통일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를린 장벽과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를 방문하면서, 동서독 통일의 과정을 통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겨레의 통일 방안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 성니콜라이 교회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182km 떨어져 있는 라이프치히는 한 때 유럽의 학문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1409년에 세워진 라이프치히대학교는 괴테와 바그너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교리와 신앙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기도 한 라이프치히는, 그러나 서양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음악 활동과도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20여 년을 활동했는데, 마태수난곡을 비롯 바흐의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 토마스 교회 입구에는 바흐의 동상이 있고 교회 안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었다(지하가 아님). 성 토마스 교회는 그만큼 바흐의 교회로 알려져 있고, 마침 내가 방문한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바흐의 칸타타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성토마스교회 안에 있는 바흐의 무덤

 

바흐가 활동했던 곳에서 바흐의 곡을 직접 들으니 약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 토마스 교회를 나와 성 니콜라이 교회로 향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1165년에 설립된 성 니콜라이 교회는 동서독이 분단되었던 시절 평화 기도회 와 집회를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서독에서는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는데 동독에 있었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군비확장 반대는 물론, 환경문제와 빈부격차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기도회와 집회를 이어나갔다. 동독의 지배아래 있었던 라이프치히와 성 니콜라이 교회는 기도회와 집회가 있을 때 마다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들에게 둘러싸이기 일쑤였다.

이렇게 시작된 기도회는 마침내 동독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이후 공산권 국가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동독 역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이 바람은 1989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성니콜라이 교회의 내부  

 

198958일부터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은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의 기도회와 관련하여 체포와 연행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 교회의 2,000석 자리는 넘쳐나기 시작했다. 동독의 통일사회당 당원들은 니콜라이 교회를 점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들 중 약 600명이 교회 신도석을 채우고 있었다. 이들은 평화의 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며 일반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600명의 점거자들은 그 임무보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과 함께 동서독 통일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기도회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1989109일 당시 동독 정권의 탄압이 절정을 이루던 상황 속에서 니콜라이 교회에 함께 있었던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니콜라이 교회 안 전시실. 전쟁과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곳이다.  

 

동독의 통일사회당 당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시작 할 수 없는 그런 교회에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예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밟아 없애라고 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평화의 기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집중하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천 명 이상의 우리가 교회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 광경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손에 촛불을 든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비폭력 정신은 군중들을 사로잡았고 실제적이며 평화로운 힘이 되었습니다. 군인, 경찰, 전투부대들이 대화 가운데 철수했습니다. 그 밤은 우리 주 예수님의 영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승자도 패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한 승리감을 갖지 않았고, 자존심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이 비폭력운동은 단지 몇 주만 지속되었지만 당과 이데올로기적 독재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수천 명! 도심 주변 거리의 수십만 명! 상가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지지 않았던 비폭력의 힘에 대한 놀라운 경험!

동독의 통일사회당 중앙위원에 속해 있던 호르스트 진머만은 그의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한 준비는 하지 못했다.”

 

 ▲성 니콜라이 교회와 교회 앞 광장에 세워진 독일 통일 상징 탑

 

성 니콜라이 교회의 사례를 마주하고 보니 2016년에 광화문에서 있었던 촛불집회가 생각나기도 했다.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만이 운집한 촛불집회였지만 상가 진열장의 유리 한 장은 물론, 거리의 쓰레기까지도 깨끗이 치웠던 놀라운 경험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시의 감동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회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와 대한민국 파주에서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독일 통일 상징탑 앞에 세겨진 동판 1989년 10월 9일을 기념하고 있다.

 

이철민
-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 전 지부장
- 4.27평화띠잇기 파주본부 대외협력팀장
- 참회와 속죄의 성당 민족화해분과장
- 경기도 평화통일교육단체협의회 운영위원
- 도서출판 바이칼 대표

- [파주에서] 편집위원

 

#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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